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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렇게 잘 맞다니.

by 수프

난 그네에 앉고, 지혜는 그네 손잡이에 발을 끼고 섰다. 지혜가 힘껏 무릎을 접었다 필 때마다 그네가 점점 위로 올라간다. 그네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그네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쌔앵쌔앵. 그리고 내 비명 소리도.

“으악, 멈춰, 멈춰 줘. 이러다 그네가 한 바퀴 돌겠어!”

“하리 너 겁쟁이구나!”

“아니, 무섭진 않은데 어지럽다고.”

“뭐? 안 무섭다고? 그럼 한 번 더 간다!”

“아냐, 아냐! 나 무서우니까 멈춰 줘.”

그네의 속도가 느려지자 난 얼른 발을 땅으로 쭉 뻗어 그네를 멈췄다. 지혜는 뭐가 그리 웃기는지 날 보고 깔깔 웃는다.


“그럼 이번엔 그네 타면서 신발 던지기 할래? 신발이 더 멀리 날아가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어? 이 놀이는 엄마가 싫어하는 놀이다. 양말이 더러워지기도 하고 잘못하다 신발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다 큰 엄만 어릴 적 신나게 놀던 기억을 다 잊어버렸나 보다. 난 지혜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나 이 놀이 좋아해!”

나와 지혜는 각각 따로 그네에 탔다. 그네의 속도가 조금 빨라졌을 때, 지혜가 ‘하나, 둘, 셋’ 하면 신발 한 짝을 벗어 앞으로 날린다. 휘익. 앗. 내 신발이 뒤로 날아갔다. 이럴 수가. 지혜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그네에서 내렸다.

“하하하, 내가 이겼다!”

내가 진 건 다 엄마 탓이다. 엄마가 이 놀이를 못 하게 해서 난 정말 오랜만에 이 놀이를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질 수밖에 없지.

‘이길 때까지 할 거야.’

“또 한 번 하자!”

또 졌다.

“또 한 번 하자!”

또 졌다. 다섯 번 중 지혜가 네 번 이기고 내가 한 번 이겼다. 드디어 이겼다.


던진 신발을 줍는데 그 옆에 반짝이는 게 보인다. 동전이다! 난 모래를 헤치고 냉큼 동전을 주웠다. 백 원짜리 동전이다. 삼십 년 전 백 원은 지금 백 원이랑 똑같이 생겼다.

“오, 동전 주웠구나! 그네 아래에는 동전이 많아. 아이들이 그네를 타다가 동전을 잘 흘리거든. 나도 여기서 동전 주운 적 있어.”

어느새 다가온 지혜가 날 보며 말한다. 부러운 표정이다.

“너 가질래? 난 필요 없어.”

“왜? 왜 필요 없어? 내가 언니들에게 오백 원 빼앗겨서 그러는 거야? 괜찮아. 그걸로 사탕이나 과자 사 먹어.”

‘겨우 백 원으로 사탕이나 과자를 사 먹을 수 있다고?’


그때,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같이 슈퍼에 가서 뭐 사 먹을까?”

괜찮다던 지혜는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우리는 오십 원짜리 딸기 맛 쭈쭈바를 하나씩 샀다. 엄청 달콤하고 시원하다. 요즘 파는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맛있다. 지혜는 쭉쭉 열심히 쭈쭈바를 빨아먹으며 말했다.

“너도 딸기 맛 쭈쭈바 좋아하는구나. 우리 진짜 잘 맞는다. 너랑 노니 시간이 참 빨리 가.”

맞다, 시간! 난 깜짝 놀라 책 표지를 봤다.

00:15


“저, 지, 지혜야. 부탁이 있는데, 오늘 이 시간을 꼭 기억해 줘. 우리가 다시 만나도 재미있게 놀 수 있으면 좋잖아. 너랑 나랑 나중에 만나도 이렇게 잘 맞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현실의 우리 엄마가 어린 엄마처럼 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엄마랑 내가 너무 잘 맞아서다. 엄마가 변한 게 슬퍼서다. 엄마는 정말 변한 걸까, 아니면 어릴 적 자신을 잃어버린 걸까.

지혜는 갑자기 진지하게 말하는 내가 이상한지 웃음을 터트린다.

“푸하하,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웃긴다. 어쨌든 알겠어. 네 말대로 집에 가자마자 일기를 써야겠다. 우리 다음에 만나면 더 재미있게 놀자.”

“그래, 더 재미있게 놀자.”

지혜는 놀이터 옆 관리사무소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이젠 집에 가야겠다. 수학 학원 끝나고 집에 도착할 시간이거든. 넌 오늘 집에 가니?”

“어. 오늘 가.”

“다음에 친척 집에 놀러 오면 이 놀이터로 나와. 난 학교 끝나고 학원 가기 전까지는 항상 여기서 놀거든.”

“그래, 그럴게. 나도 이제 가야겠다. 친척들이 걱정하고 계실지도 몰라.”

“그래, 잘 가. 참, 김지혜 꼭 찾아!”

“응, 고마워. 너도 잘 가.”


어린 엄마가 아파트에 들어가는 걸 보고 얼른 놀이터 옆 관리사무소로 들어갔다. 계단 옆으로 화장실이 보인다. 난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거울 책을 폈다. 책 속 거울을 화장실 거울과 겹치게 든다. 거울에 얼굴이 나타난다.

“출발했던 곳으로 데려다주세요.”

“네, 출발합니다.”

거울에서 얼굴이 사라지고 바람이 나온다. 바람은 점점 거세지다 태풍이 되어 내 몸을 휘감는다. 난 눈을 꼭 감았다. 한참 뒤 산들바람으로 변한 태풍이 날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는다. 툭. 책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린다.

살짝 눈을 떴다. 익숙한 나무 장판이 보인다. 서재 바닥이다.

‘아. 돌아왔구나.’

내 옆에 놓인 거울 책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했다.

“재미있는 여행이었어요. 고마워요.”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거울 책을 펼쳐 서재의 거울과 겹치게 들었다. 얼굴도 나오지 않고 음성도 들리지 않는다.

‘역시 한 번 뿐이구나.’

어쩐 일인지 아까 과거로 가는 태풍이 불 때 쏟아졌던 책들은 책장에 가지런히 잘 꽂혀 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난 거울 책을 금고 안에 넣고 금고를 잠갔다. 열쇠도 제자리에 놓았다. 모든 건 내가 서재에 들어왔을 때와 같아졌다. 달라진 건 나뿐인 건가?


난 열 살인 엄마와 지금의 엄마를 생각했다.

‘열 살인 엄마는 정말 수다쟁이야. 인기 있는 가수의 노래와 춤을 좋아하지. 비록 춤은 못 추지만 말이야. 모범생이라더니 공부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말이나 하고 수학 학원 땡땡이나 치고. 그래도 주변 사람을 도와주려는 착한 아이야. 내가 없는 순발력과 용기도 있고. 엄마가 아니었으면 난 그 언니들에게 잡혀서 현재로 못 왔을 수도 있어. 으, 끔찍해. 생각해보면 사실 지금 엄마도 그리 나쁘진 않아. 말이 많은 게 잔소리로 조금 변했다는 것만 빼면 말이야. 잔소리도 사실은 맞는 이야기긴 하지.’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다. 난 서재 문을 열고 나갔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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