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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05. 2024

사인 유니폼

마흔 넘어 처음으로 

*사인 유니폼 세탁 방법: 

1. 유니폼이 잠길 정도로 찬물을 받은 후, 울샴푸를 한 바퀴 둘러 풀어준다. 

2. 유니폼을 뒤집어 1번 물에 담근다. 

3. 10분 정도 기다린다. 

4. 얼룩진 부분이 있다면 손으로 살살 비벼준다. 전체적으로 주무르며 때를 뺀다.

5. 유니폼을 헹군다. 

6. 살살 눌러 물을 빼준 후 마지막엔 수건으로 눌러 물기를 없앤다. 

7. 서늘한 바람이 통하는 곳에 유니폼을 널어 건조한다.     


 

옷장에 입을 옷이 없다. 항상 입을 옷이 없긴 하지만, 계절이 바뀔 때면 더 입을 옷이 없다. 그 와중에 면접이 있거나 결혼식에 가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더더욱 입을 옷이 보이지 않는다.      



옷장의 옷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어릴 때 읽었던 슈베르트 위인전이 생각난다.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 엄청 가난했다. 빈 궁정 아동합창단 시험을 보러 가야 하는데 아무리 옷장을 봐도 다 해진 옷뿐이다. 슈베르트는 고민하다 형의 큰 회색 옷을 입고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옷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미성의 아름다운 슈베르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슈베르트는 빈 궁정 합창단에 뽑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내 옷장을 보며 옷을 고르고 골랐던 슈베르트를 생각한다. 나는 슈베르트처럼 특출 난 재능이  없으므로 상황에 맞는 옷을 잘 입어야 한다. 오늘은 특별히 옷을 더 잘 입고 싶다. 오랜만에 친한 선배와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 선배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청담동에 사는 사람이다. 아가씨 같은 외모에 어찌나 예쁘게 꾸미고 다니는지. 평소에 주로 운동복을 입는 나는 너무 선배와 차이 나게 입으면 안 될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오랜 고민 끝에 입을 옷을 결정했다. 우선 바지는 검은 알라딘 바지(몸빼바지)를 입기로 한다. 난 키에 비해 골반이 있는 편이라 긴 티셔츠를 입어 엉덩이를 가리곤 하는데 알라딘 바지는 바지 자체가 벙벙해서 내 골반이 아니라 바지가 큰 것처럼 보인다. 알라딘 바지를 입은 김에 짧은 상의를 입고 싶다. 짧은 검은색 가죽재킷을 입을까? 좀 추울 수도 있는데. 난 가죽재킷 안에 짧은 회색 후드티를 입기로 했다. 이 재킷은 4만 원을 주고 5년 전에 모 쇼핑몰에서 산 거다. 회사 후배들은 이 옷을 보더니 4만 원이 아니라 40만 원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래, 이 정도면 됐어.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재킷 소매 끝이 자글자글 조금 갈라져 있다. 오른쪽 소매는 괜찮은데 왼쪽 소매만. 흠, 뭐 이걸 알아차리겠어? 옷을 바꿔 입을 시간도, 에너지도 없어 가방을 챙기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멀리 선배가 보인다. 선배는 무릎 위까지 오는 짧은 원피스에 파스텔톤 얇은 코트를 입었다. 내가 소화할 수 없는 스타일이다. 예쁘다. 만화에서 뿅 튀어나온 사람 같다.      



같이 점심을 먹고 카페로 갔다. 내 옆자리에 앉은 선배는 내 재킷 소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보고야 만 것이다. 

“어머, 얘, 소매!”

난 그냥 씩 웃었다. 선배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옷이 춥지 않은지 물었다. 더럽게 얇은 가죽 재킷이다. 종잇장같이 얇은. 그러니까 자글자글 소매가 찢어졌지.

“날이 따뜻해서 괜찮아.”

괜찮기는 무슨. 안 추운 척 이를 악물고 있는데. 선배와 이야기하는 내내 소매가 찢어진 왼쪽 손은 무릎에 놓고 오른쪽 손만으로 리액션을 하며 대화했다. 집에 오면서 생각했다. 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건데. ‘종잇장같이 얇은 옷이 정말 종잇장처럼 찢어졌네!’하고 웃을걸. 아니면 그냥 쿨하게 ‘드디어 수명을 다했군’ 하고 말할걸.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옷을 많이 사지 말자고 결심했다. 한 친구와 옷을 한 번 사면 찢어질 때까지 입자고, 입기 싫어진 옷은 서로 바꿔 입자고 이야기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옷이 해져서 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드디어, 옷 하나를 수명이 다할 때까지 입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창피했던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옷을 많이 사지 말자고 다짐해도 내 결심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게 있으니, 바로 야구 유니폼이다. 비록 옷이 별로 없을지라도 상황에 맞게 옷 입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야구장에서는 바로 야구 유니폼이 상황에 맞는 의상이다. 한 구단의 유니폼 종류는 아주 많다. 게다가 여러 캐릭터, 브랜드와 콜라보를 한 유니폼이 계속 출시되어 팬들의 구매욕을 자극한다.     



그런데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유니폼도 있다. 바로 선수의 싸인이 되어 있는 유니폼이다. 야구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유니폼을 보면 등에 선수의 싸인이 되어 있는 유니폼이 많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 선수들의 사인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선수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경기장에 도착하는 건 게으른 우리에겐 정말 어렵고 경기가 끝나고 사인을 받으려고 하면, 8회쯤에는 이미 버스 앞에 대기를 하고 있어야 하므로 그것 또한 어렵다. 어떻게 8회와 9회를 포기한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우리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광주 챔피언스필드에 갔던 날이었다. 듣던 대로 챔피언스필드에는 원정팬 자리에도 기아팬들이 아주 많아 꼭 적진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경기가 끝나갈 때쯤 남편이 말했다.

“이렇게 롯데 팬이 없는 경기는 처음이야. 이때를 노려서 선수들에게 사인을 받자. 바로 옆이 원정 선수 출입구야.”

끝나자마자 후다닥 짐을 챙겨 나가니 정말 원정 차량 펜스 앞에 사람이 많지 않다. 원정 출입구 제일 앞, 1호차 근처에서 매직과 유니폼을 들고 선수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선수들이 빨리 나오지 않아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펜스에 기댔다가 다리를 올렸다가 스테프에게도 혼이 났다가.... 그래도 선수들이 나오지 않는다.           


계속 기다린다. 한참 뒤에 한 명, 두 명씩 우리 팀 선수들이 나왔다. 그런데 원정 출입구 제일 앞인 1호차 쪽으로 올 줄 알았는데 2호차와 3호차 사이에서 나타난다. 알고 보니 선수들이 탈 거라고 생각했던 1호차는 코칭스테프 차였다. 선수들은 아무도 우리가 있는 쪽으로 오지 않는다. 난 무리에서 이탈해 그늘에 앉아 있는 남편 곁으로 갔다. 1호차 앞에 있어 봤자 사인 받지 못할 게 뻔한데 딸은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킨다.      



그날 홈런을 친 손성빈 선수는 아주 오랫동안, 거의 50명 넘게 사인을 해 주는 것 같았다. 

“저도요, 저도 사인해 주세요.”, “손성빈 선수, 너무 좋아해요.”

여기저기서 싸인해 달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그 친절한 선수도 우리 딸이 서있는 곳까지는 올 수 없다. 선수와 우리 딸 사이에 너무 많은 팬들이 있는 까닭이다.      



선수들이 거의 다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한 선수가 1호차 쪽으로 온다. 앞에서부터 사인을 해주고 드디어 우리 딸에게도 사인을 해준다. 조금 뒤 차량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했다. 딸은 뒤를 돌아 활짝 웃으며 유니폼을 흔들었다. 



“엄마, 나 사인 받았어! 그런데 싸인해 준 선수가 누군지 모르겠어.”     

난 딸에게 그 선수 이름을 알려주었다. 오랜 시간 기다린 딸에게 웃음을 준 고마운 선수. 딸은 이제부터 그 선수를 응원하겠단다. 경기에 많이 나와서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길 나도 응원한다. 드디어 야구장에 갈 때 입을 완벽한 의상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고민이 됐다. 사인 받은 유니폼은 어떻게 세탁하지? 세탁기 돌리면 어렵게 받은 싸인이 지워지는 거 아냐? 검색해 보니 역시 누군가가 이미 그런 질문을 올렸고 많은 팬들이 답한 싸인 유니폼 세탁법이 있다. 그 방법대로 빨아 봤는데 싸인이 말짱하다. 드디어 향기로운 울샴푸 냄새까지 나는 완벽한 야구장 룩이 완성되었다. 



비록 청담동 선배를 만날 때, 결혼식에 갈 때, 면접 볼 때 입을 옷은 없어도 야구장에 갈 때 입을 완벽한 의상은 있다. 이젠 이 싸인 유니폼이 너덜너덜 찢어질 때까지 열심히 입어야겠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드는 의문 하나. 과연 이 싸인 유니폼이 해지기 전에 롯데가 우승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욕심이 과했다. 가을야구에는 갈 수 있을 것인가. 설마, 설마, 가... 을.. 야구는 가겠지?      



(*참고. 얼마 전, 귀찮아서 싸인 유니폼을 그냥 세탁기에 넣고 돌렸는데 말짱했다. 그동안 열심히 손빨래를 한 게 아깝구나.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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