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프 Oct 04. 2024

홈런

큰 거 한 방에 연연하지 말자

*홈런(homerun): 

야구에서 타자가 친 공이 펜스를 넘어가거나 타자가 타격을 한 뒤 한 번에 모든 루를 통과하여 홈으로 돌아와 자신의 힘으로 득점을 올리는 것.      



야구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상대 팀과 점수 차가 크게 날 때, 나는 말한다. 

“큰 거 한 방만 해라, 큰 거 한 방만.”     



선두 타자가 안타를 치고 출루한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다음 타자가 안타를 치거나 볼넷으로 출루한다. 와우, 이게 웬일이냐. 엉덩이가 들썩인다. 무사(아웃 카운트가 하나도 없는 상태) 1, 2루. 희망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누군가가 수비수 정면으로 공을 날리고 뜬공을 치고 최악의 경우 땅볼을 보내 병살(두 사람의 주자를 한 번에 아웃시키는 일)로 이닝을 정리해 버린다. 안타도 물론 좋고 감사하지만, 주자가 홈까지 들어오는 길은 너무 험란하다. 그래서 경기가 잘 안 풀리는 날은 하나로 다 해결되는 ‘큰 거 한 방(홈런)’을 바라게 된다.


      

여태껏 나도 그랬다. 나에게 큰 거 한 방은 공모전 당선이다. 공모전 당선이면 지금의 내 사회적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끔 높은 직급의 동료 소식이 들려올 때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머리로는 내가 싫어서 그만둔 일이니 아쉬워할 것 하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그게 안 되는지 그런 소식을 들으면 자꾸 몸이 움츠러든다. 

‘이번 공모전에는 꼭! 당선되어야지.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잘 마무리해야지.’

나의 욕심이 범벅된 글은 그렇게 재밌지도 않고 주제가 뭔지도 알기 어려운 글이 되어 스스로 무너진다. 홈런은커녕 수비를 못해 스스로 자멸하는 야구팀처럼.     



함께 동화를 쓰던 언니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나에게 공모전만 고집하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 글을 하나 마무리하면, 여러 출판사에 투고를 해 보라고. 세상에는 다양한 취향의 편집자가 있으니 나의 글에 흥미를 갖는 편집자도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난 그게 잘 안 됐다. 공모전에 당선되면 출판사에서 알아서 홍보도 해주고 독자들도 더 관심을 가질테니, 공모전 당선이 유일한 답 같았다. ‘큰 거 한 방’만 생각하던 내가 정신을 차리게 된 사건이 있었다. 



어느 금요일 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한 예능을 보게 됐는데 거기서 빵을 만드는 장면이 나왔다. 아주 쉬워 보였다. 난 장난삼아 옆에 있는 남편에게 “빵 좀 만들어줘.”라고 말했다. “당신이 좀 만들어 주지?”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남편은 “오케이, 좋아. 빵을 한 번 만들어 볼까?”하고 말했다.

“아냐, 농담이야. 이 밤에 무슨 빵을 만들어.”

오히려 이야기를 꺼낸 내가 당황스러워 한발 물러섰다. 

“어릴 때는 엄마가 가끔 카스텔라를 만들어줬어. 빵 만드는 게 뭐 얼마나 어렵겠어?”

남편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어릴 적 엄마가 전기밥솥에 카스텔라를 해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막 만든 부드럽고 포슬포슬했던 빵의 촉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딸은 그새 노트북 앞으로 가서 ‘초보 카스텔라 만들기’를 찾아보고 있다. 

“박력분, 우유, 계란, 설탕, 버터, 꿀. 우아, 우리 집에 재료가 다 있어!” 

재료가 있으니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내가 잠깐 씻고 나온 사이 재료들은 다 계량되어 식탁 위에 놓였고 아이는 금세 계란을 흰자와 노른자로 나누었다. 사놓고 몇 개월간 쓰지 않던 핸드블랜더는 흰자를 엄청 휘저어야 하는 머랭 치기를 할 때 빛을 발했다. 액체였던 흰자가 움직이지 않는 머랭 상태가 되면 70%는 완성이다. 머랭에 노른자와 다른 재료를 섞고 틀에 넣은 후, 오븐에 구우면 끝.      



 20분 뒤 맛있는 빵 냄새가 온 집안을 꽉 채웠다. 요알못(요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인 나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냄새 못지않게 맛도 아주 좋았다. 내일은 베이킹파우더도 사서 더 그럴싸한 빵을 만들어보자며 모두 뿌듯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대형마트에 가서 식빵 틀을 샀다. 베이킹파우더와 아몬드 분말, 버터를 바를 붓도 샀다. 아이는 나중에 자기가 크면 빵집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우린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고 살짝 배가 고파올 즈음,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엔 나도 적극적으로 도왔다. 문제는 계란에서 발생했다. 계란의 흰자와 노른자를 아이가 분리하는데 아뿔싸, 흰자에 노른자가 풍덩 빠진 것이다. 아이가 숟가락으로 열심히 건져냈지만 깨끗하게 거둬내진 못했다. 

“괜찮아. 이 정도면 거의 다 건져낸 거야. 괜찮아, 괜찮아.”

남편과 나는 아이를 토닥이며 머랭 치기에 들어갔다. 십 분이 지나도 흰자가 굳질 않는다. 핸드블랜더가 뜨거워져 터질 것 같다. 남편은 핸드블랜더의 코드를 빼고 선풍기 앞으로 가져가 열기를 식힌다. 그사이 나는 거품기를 가져와 수동으로 열심히 흰자를 휘저었다. 핸드블랜더 열기가 조금 식었다 싶으면 다시 전원을 연결해서 머랭을 치다가 다시 전원을 빼고 열기를 식히다가 다시 전원을 연결해서 머랭을 치다가. 이걸 세네번 반복하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희한하다, 어제는 그냥 됐는데. 뭐가 문제일까.”

“노른자가 조금 들어가서 그런가 봐.”     



 다시 계란 다섯 개를 꺼냈다. 아이가 흰자와 노른자 분리 담당은 자기라면서 자신이 하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아이의 행동이 다 눈에 거슬린다.

“아니, 계란을 볼(bowl)에 쳐서 깨지 말고, 식탁에 쳐서 깨라고. 볼에다 깨면 아까처럼 계란 노른자가 볼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잖아.”

“엄마, 어제도 이렇게 했는데 잘만 했어.”

자꾸 언성이 높아진다. 내가 눈을 치켜뜨고 쳐다보니 긴장했는지 아이는 계란을 부엌 바닥에 떨어뜨렸다. 짜증이 확 났다. 

“그거 봐, 그거 봐. 엄마가 너 그럴 줄 알았다.”

“됐어, 이렇게 싸울 거면 하지 마.”

남편이 한소리 한다. 다행히 아이는 나머지 계란의 흰자와 노른자를 잘 분리했다. 이젠, 머랭 치기 순서. 난 남편의 손에 핸드블렌더를 쥐여줬다. 이번엔 다행히 거품이 난다. 그런데 이번에도 뭔가 이상하다. 아까와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 남편은 뜨거워진 핸드블랜더를 식히고, 내가 거품기로 휘젓고, 또 핸드블랜더로 하다가, 핸드블랜더를 식히고, 거품기로 휘젓고. 이번엔 뭐가 문제일까. 쇠로 만든 볼이라 잘 안 되나? 사기그릇으로 바꿨다. 그래도 되질 않는다. 더 오목한 그릇으로 바꿨다. 그래도 되질 않는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조금만 노른자가 섞여도, 그릇에 조금만 물기가 있어도 머랭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한 방향으로만 계속 머랭을 쳐야 한단다. 이런. 전날에는 이런 걸 다 몰랐지만 우연히 상황이 다 맞아 떨어져 한 번에 머랭이 된 것이다.      



다시 계란 다섯 개를 꺼냈다. 빵을 만들기 시작한 지 벌써 2시간이 지났다. 남편과 아이가 돌아가면서 머랭을 치고 난 실패한 계란 10개를 모아 계란말이를 했다. 버터와 설탕이 듬뿍 들어간 계란말이. 머랭을 치는 남편과 아이 입속에 하나씩 넣어주니 계란빵 같다며 잘 먹는다. 엄청 달다, 달아. 남편은 머랭을 치다 말고 급한 일이 생겨 회사에 갔고 아이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밖으로 나갔다. 식탁에는 계량된 밀가루와 베이킹파우더, 치다 만 머랭이 덩그러니 남았다. 싱크대에는 설거지가 한 무더기 쌓여있고 식탁 주변은 밀가루와 설탕으로 뽀얗다. 난 빵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한 시간쯤 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머랭을 쳤다. 머랭이 되든지 핸드블랜더가 폭발하든지 둘중 하나겠지, 하는 생각으로 멈추지 않고 흰자를 휘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흰자가 굳기 시작했다. 2분쯤 더하니 완전히 흰자가 굳어 그릇을 거꾸로 뒤집어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머랭이 됐다. 거기에 남은 재료를 넣고 섞은 후, 식빵 틀에 넣어 오븐에 구웠다. 속까지 잘 안 익어서 10분을 더 돌렸다. 드디어 카스텔라가 완성됐다. 조금 뜯어 먹어보았더니 맛있다. 그런데 이미 계란 10개가 들어간 달디 단 계란말이를 먹어서 그런지 별로 먹고 싶지않다. 완성된 빵을 랩으로 덮어놓았다.      



 지친 몸으로 샤워를 하는데 얼마 전 공모전에 떨어졌을 때 친구가 나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공모전에 당선되고 나서 몇 년간 작품을 못 내는 사람이 많대. 그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되는 사람도 많고. 어쩌다 좋은 작품을 써서 덜컥 당선된 거지. 지금 떨어진 게 더 나은 걸 수도 있어. 계속 이렇게 쓰다 보면 실력도 쌓이고 또 네 작품도 쌓이는 거잖아.”

그땐 잘 몰랐는데 어쩌다 한 번 맛있는 빵을 만들고 보니 친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우연히 한 번 홈런을 친 후, 홈런에만 연연하는 선수가 된다면 곤란하다. 내가 공모전에 적합한 글을 쓰는지, 투고에 적합한 글을 쓰는지, 아니면 긴 호흡의 글이 맞는지, 짧은 글이 맞는지 잘 모른다. 우선은 다 해 볼 일이다. 알고 보면 아직 1군도 2군도 아닌 육성선수(프로에 지명되지 못한 선수 중 팀에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어 계약한 선수. 계약금 없이 최저 연봉을 받는다)가  ‘큰 거 한 방’이니 뭐니 하며 주제넘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전 05화 연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