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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02. 2024

연패

어떻게 해도 안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떻게 해도 잘 될 때가 있다

*연패(連敗): 

싸움이나 경기에서 연속하여 짐. 한국 프로 야구 최다 연패는 1985년 삼미 슈퍼스타즈와 2020년 한화이글스의 18연패로 기록되어 있다.     


1.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이 경기를 이기면 중계가 끝나도 채널을 돌리지 않는다. 수훈 선수 인터뷰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이긴 팀의 타자 한 명, 투수 한 명이 인터뷰를 한다. 인터뷰를 들으며 “그래, 거기서 참 잘했지, 대단했지.” “야구만 잘하는 게 아니라 말도 잘하네. 아주 다 가졌어.” 하며 추임새를 넣는다. 


     

그날 경기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하이라이트도 다시 본다. 다 본 경기지만 이긴 경기는 봐도 봐도 재미있다. 오히려 긴장감 없이 즐길 수 있어 좋다. 조금 더 기다리면 우리 구단 유튜브 채널에 우리 팀이 잘한 것만 편집한 영상이 올라온다. 그 영상에서는 더그아웃(dugout: 코칭스테프와 선수들이 대기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공간)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선수들끼리 격려하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입꼬리가 올라간다. 팬심이 마구 솟는다. 


     

이 루틴대로 야구를 즐긴 게 언제였던가. 우리 팀은 *오늘로 8연패.


     

대부분 팀이 시즌 중에 한 번씩은 연패에 빠진다. 어떻게 해도 잘 안 되는 시기가 있다. 우리 팀은 타자도 투수도 전략도 잘 먹히지 않는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그나마 오늘은 타자들이 좀 잘해주는가 싶었는데 투수가 못해 또 밸런스를 맞춘다. 먼저 실점을 하고 그 상태에서 계속 실점을 해서 지기도 하고 먼저 선취점을 뽑아내 ‘오늘은 좀 다른가?’ 싶을 때 역전을 당해 지기도 한다. 역전을 당해 진 경험이 쌓이자 이젠 이기고 있을 때도 여유 있게 야구를 볼 수가 없다. 불안, 초초, 전전긍긍.      



사람도 그렇다. 어떻게 해도 안 될 때가 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똥멍청이 같아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한때는 일을 잘한다고 칭찬받았던 적도 있었는데, 어떤 부서에 가니 내가 세상 제일 멍청해 하루종일 불려 다니며 혼이 난다.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뛰고 서류 컨펌을 받으러 갈 때마다 몸이 쪼그라든다. 간단한 질문도 머리가 하얘져 대답을 못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뒤를 돌자마자 생각난다. 

‘아니, 왜 이 말을 못 했지?’

집에 오는 길엔 나도 내가 싫어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나름대로는 생각하고 또 실행에 옮기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그럴 때가 있다. 끝나지 않는 터널 같은.     



그때 쓴 일기가 있다.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자기 비하의 문장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일이 안 되려니 1년 전에 끝난 프로젝트의 서류도 문제가 된다. 그 프로젝트와 관련된 다른 계약이 진행되야 해서 당시 작성한 서류를 다시 검토하게 됐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때 못 보고 지나쳤던 실수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이랬다고?’ 나도 나에게 놀란다. 관련 부서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연신 고개를 굽신거린다. 왜 이렇게 작성했냐고 따져 묻는데 나는 아무 생각이 나질 않는다. 정말 모르겠다. 그러니까 일이 꼬이려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전환이 필요하다. 안 좋은 흐름을 끊어낼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에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다른 회사에서는 내가 일을 잘하는 사람이다. 

“이번 프로젝트 기획 아이디어 좋았어요.”

“신상품 이론적 배경 작성해 주신 거 도움 많이 됐어요.”

잘한다는 말을 들으니 더 잘하고 싶었고 정말 더 잘했다. 자신감이 생겼다. 내 존재 자체가 문제인 게 아니었다.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건 의외로 아주 사소한 것일 때가 많은데. 별로 안 친한 친구가 무심코 툭, 던지듯 하는 말이나 주변 사람들의 긍정적인 피드백, 우연히 책에서 접한 이야기일 때도, 드라마 주인공 속 대사일 때도 있는데.      

롯데는 과연 어떤 사소한 것을 기회로 삼아 반등할 것인가. 어떤 것이라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꽉 붙잡아 전환점을 만들기를. 과연 내일은 연패를 끊는 1승일까 9연패일까. 나는 롯데 자체가 문제가 아님을 믿는다. 



“야구는 실패의 운동이다. 열 번의 기회 중 세 번 이상만 안타를 쳐도 우수한 타자로 인정받는다. 성공에 대한 칭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이를 받아들이고 겪어 내는 방식이다. ‘이 실패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음에 내가 다시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실패 역시 학습의 과정이다. 그리고 실패는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열쇠이기도 한다. 어쩌면 실패는 우리가 더 나은 존재로 탈바꿈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 <레전드는 슬럼프로 이루어진다> 중 p11)     

(*24. 4. 17)     



2.

응원하는 야구팀이 지고 있을 때, 지는 원인이 무엇인지 찾는다. 그러다 안 되면 그 이유를 주변, 또는 나에게서까지 찾는다. 오늘은 딸에게 불똥이 튀었다. 

“네가 상대 팀 응원가 불러서 우리가 지는 거야.”

딸에게 뭐라고 한다. 

“아니, 저 신나는 응원가를 어떻게 참냐고.”

딸은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한다. 

“어쨌든 그거 때문에 지고 있는 거 같으니까 조금만 참으라고.”

이제 아이는 우리 팀 응원가만 부른다. 그런데 또 점수를 잃는다.

“아놔, 내가 계속 경기를 봐서 점수를 잃는 건가?”

“응, 엄마 보지 말아 봐봐.”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유다.     



연패가 계속되고 있는 시점에서 남편이 영국으로 출장을 갔다. 딸이 나에게 말했다. 

“이제야 롯데의 연패가 아빠 때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됐어. 아빠가 경기를 안 보자마자 이기면 여태껏 아빠 때문에 진 거야.”

“그렇지, 그렇지.”

롯데의 패배 원인은 남편 때문이 아님이 밝혀졌다.


      

야구를 보는데 롯데의 세리머니가 바뀌었다. 안타나 홈런을 치고 출루를 하면 축구에서 골을 넣고 세리머니를 하는 것처럼 타자들도 세리머니를 한다. 세리머니는 매년 바뀌는데 24년 롯데의 세리머니는 롯데자이언츠의 구호인 ‘투혼투지’에서 따와서 양손으로 브이(투혼 투지의 ‘투, 투’의 의미) 포즈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안타를 치고 누상에 나간 주자들을 보니 손목을 엇갈려서 위로 올리는 세리머니를 한다. 팀이 연패에 빠지니 바꿀 수 있는 건 다 바꾸는 모양이다.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는데 손을 올려 동아줄을 잡는 포즈라고 했다. 절실함이 느껴지는 세리머니다.  혹시나 롯데 선수들이 열심히 하지 않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열심히 하는데도 팀이 안 풀리니까 세리머니까지 바꿔보는 게 아닐까.      



*그날은 온 우주가 롯데를 연패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경기였다. LG의 베테랑 선수들이 수비 실책을 세 개나 했다. 땅볼이어서 바로 잡아서 던지면 더블플레이(병살)로 투 아웃을 시킬 수 있는 공을 놓쳐 우리에게 2점이나 주었다.  실수는 우리만 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한다. 얼마나 빨리 잊고 만회하는가가 관건이다. 선수들이 8연패의 기억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가지면 좋겠다. 어떻게 해도 안 될 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온 우주가 도와줄 때도 있다. 물론, 열심히 하는 건 기본으로 깔고.      



하던 대로 했는데 갑자기 모든 좋은 기운이 몰려올 때가 있다. 아이를 낳고 출산 휴가 3개월 후, 복직했다. 그동안 일의 감을 잃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아동 전집을 기획하고 있던 터라, 그 전집을 감수해 줄 교수님을 찾아야 했다. 책정된 비용이 많지 않아 저렴한 비용으로 해주실 분을 섭외해야 했다. 고생 좀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1순위로 꼽았던 교수님이 전화 한 번에 승낙하셨다. 이런 일이 몇 번 더 있었고, ‘오, 역시 김대리가 오니까 일이 착착 진행되네.’ 하는 칭찬을 들었다. 그러니까, 또 그럴 때도 있다.      



이렇게 훈훈하게 글을 마무리하고 싶었으나, 롯데는 몇 번의 승리 이후로 또 패패패, 연패중이다. 역시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하던 걸 계속하며 꾸준히 나아가는 것. 그러면 언젠가 또 모든 기운이 나를 향할 거라는 걸 믿는 것이 중요하다. 이건 롯데 자이언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이다. 

(*24. 4. 18)


**첨언: 글을 올리는 시점에서.. 롯데에 대한 나의 믿음은 다음 시즌으로 이월되었다.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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