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울 수 있을 때 한껏 즐거워하기
야구 경기를 하기 위한 경기장으로 야구 경기를 하는 필드와 관중석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야구 필드는 내야와 외야로 이루어진다. KBO리그 1군 구장 중 가장 큰 규모의 야구장은 잠실에 있는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이다.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의 홈 구장으로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두 구단의 홈구장이다. 1982년 원년 시즌부터 사용된 오래된 야구장으로 펜스 거리가 가장 멀어 홈런이 적게 나오는 구장이다. 좌석은 23, 750석이다. 가장 작은 규모의 야구장은 대전의 한화생명이글스파크로 좌석이 13,000석밖에 되지 않아 수용인원이 가장 적다. 1964년에 개장해 10개 구단의 홈구장 중 가장 오래된 야구장이기도 하다. 시설이 노후화되어 2025년 개막전부터 사용하기 위한 신축구장(베이스볼드림파크)을 건립중이다.
야구장의 기본 감정값은 ‘흥분’이다. 지고 있으면 지고 있는대로 이기고 있으면 이기고 있는대로 감정이 격해진다. 경기 스코어에 따라 시무룩했다가 환호하고, 환호하다 좌절한다. 감정이 널을 뛴다. MBTI에서 3번째 알파벳이 T라고 자신하시는 분, 야구장에 와 보시라. 자신의 숨겨진 F를 발견하게 될 테니. 생각지도 않았던 적시타가 터지면 평소 큰 스킨십을 하지 않던 딸과 남편을 힘껏 껴안으며 방방 뛴다. 활짝 웃는다.
그래서인지 올해 직관 승률이 처참함에도 불구하고 기회만 되면 야구장에 가려고 한다. 그곳에서만 경험하는 떼창, 응원, 먹거리들이 신나고 즐겁다. 내가 아빠와 처음 야구장에 갔던 것처럼 딸도 나와 함께 처음 야구장에 갔다. 아이에게 즐거운 추억, 즐거운 공간을 알려준 것 같아 뿌듯하다.
어떤 공간은, 그곳을 떠올리면 감정이 함께 따라온다. 야구장도 그렇고 내가 학창시절을 보냈던 동네도 그렇다. 기억 속 첫 집은 아니지만 내 고향 같은 곳은 목동 아파트다. 지금은 학군지로 유명하지만 내가 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서민 아파트에 가까웠다. 그곳을 떠올리면 뭔가 아련하고 애잔한 마음이 든다. 함께 놀았던 친구들이 아파트 배경 안으로 들어와 겹쳐진다. 목동은 지금 사는 곳에서 차로 삼십 분 정도의 거리인데도 한번 가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번에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화장실에서 큰일을 볼 때, 핸드폰으로 이런저런 걸 검색해보는데 그날따라 맛있는 분식집 소개 글을 보게 되었다. 놀랍게도 내가 중학교 때 즐겨가던 분식집이었다.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반가운 마음에 화면을 캡처해 동생에게 보내고 바로 분식집에 갈 날짜를 정했다.
동생과 전철역에서 만나 분식집이 있는 아파트 단지까지 걸어갔다. 단지가 시작되는 1동부터 옛날 이야기가 펼쳐졌다. 1동 앞 수학학원, 버스 정류장, 1동과 5동에 살던 친한 친구, A 상가. 동생은 A 상가에 있던 떡집이 아직도 있다며 놀라워했다. 난 2층에 책 대여점이 있어 열심히 들락거렸던 이야기를 했다. 동생은 책 대여점을, 난 떡집을 기억하지 못했다.
A 상가 옆 9동에는 아빠 친구가 살았었다. 아빠 친구 부인이 우리 초등학교 선생님이었고 동생도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너 어릴 때 왜 엄마가 아빠한테 맞고 산다고 했어? 그 얘기가 아빠 친구 부인에게 들어가서 그 선생님이 너네 담임 선생님에게 사실이 아니라고 정정해줬잖아.”
“하하, 그때 엄마한테 이상한 말 하고 다닌다고 엄청 혼났었어.”
동생은 자기도 황당한지 깔깔 웃었다.
“그때 엄마 걱정거리가 많았길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네가 그 걱정 자리를 다 채울 뻔했다. 지금은 너 완전 멀쩡한데 말야. 그러니까 애들은 어느 정돈 알아서 자라나 봐.”
나만 어릴 때 거짓말을 많이 한 줄 알았는데 동생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인건가. 엄마가 힘든 일이 많아 미처 우리에게 열심히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이.
B 상가 옆 우리가 살던 동이 나왔다. 그 옆에는 큰 놀이터가 하나 있다.
“어, 놀이터가 다 바뀌었어! 그 통나무로 지었던 구조물도 없어졌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동생은 7살이었을 때다. 예전 동네에서 엄마와 친하게 지내던 손님이 오셨고, 나와 동생은 그 틈에 집 앞 놀이터에 가서 신나게 놀았다. 그 놀이터에는 계단처럼 밟고 올라간 후 타고 넘어가는 통나무 구조물이 있었다. 동생은 거기서 놀다가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에 목이 끼었다.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로 몸을 넣고 빠져나오려다 목이 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동생의 목을 빼려고 밀어 보고 당겨 봐도 소용없었다. 동생은 엉엉 울고 난 당황해서 머리가 하얘졌는데 그때 어떤 아저씨가 오셨다. 아저씬 상황 파악 후, 나에게 얼른 집에 가서 엄마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 네네, 대답하고 후다닥 집으로 뛰어갔다.
문을 벌컥 열고, 엄마, 엄마! 불렀다. 식탁에 앉은 엄마와 엄마 친구가 눈이 동그래져 날 쳐다봤다. 하하 웃고 있던 엄마의 평화로운 시간. 내가 사실대로 말하면 난리 날텐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무슨 일이야?”
엄마의 물음에 난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아니, 그냥. 하고 얼버무렸다. 엄마는 무슨 일이냐며 재차 물었고 난 아니라며 밖으로 나왔다. 터덜터덜 걸어 다시 사고 현장으로 갔다. 어쩌지, 내 동생은 어쩌지. 아저씨에게는 엄마가 바쁘셔서 나오실 수 없다고 말했다. 아저씨의 어이없다는 표정이 생각난다.
아저씨는 직접 공구 상자를 가져오셔서 통나무와 통나무를 연결한 나사를 풀고 동생을 구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꿈 같은 일이다. 놀이터 구조물의 통나무를 어떻게 분해할 수 있지? 아저씨가 통나무 구조물을 분해하는 장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구조물에 목이 끼었던 동생이 자유로워졌다는 것, 그것만 확실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라 나조차도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할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다른 놀이터와 달리 통나무 한 개가 빠진 놀이터 구조물이 그 일은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걸 말해주었다. 중고등학교 때 가끔 친구들에게 통나무가 왜 저기만 한 개가 없는지 아냐고 물어보았다. 친구들은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고, 나는 내 동생에 저기에 목이 끼었는데 목이 빠지지 않아 지나가던 아저씨가 통나무를 제거해 주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에이~’하며 믿지 않았다. (동생과 이 사건에 대해 나중에 이야기했는데, 그때가 아파트 분양한 지 얼마 안 됐던 때라, 놀이터 주변에 조경하시는 분들이 계셨고, 그분들 중 몇 분이 와서 동생을 빼주려 했는데 잘되지 않자, 마침 공구 상자가 있어 구조물의 나사를 풀어 동생을 구해주었다고 했다. 나는 주변의 조경 공사를, 동생은 옆에 있었던 나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했다.)
마흔이 넘은 동생과 나는 그 놀이터 등나무 벤치에 앉아 놀이터를 봤다. 우리 사건의 증거인 구조물은 없어지고 동생과 나의 추억만 남았다. 어릴 때 난 어떤 아이었을까. 동생을 구하는 게 먼저인데 왜 그 말을 엄마에게 하지 못한 걸까. 그때는 ‘아니’라는 말도 어쩌나 하기 어려워했는지. 어린 나를 떠올려 보면 이해되지 않고 답답한 부분이 많다. 그 아저씨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는 제대로 했을까. 이제 와 늦었지만, 아저씨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곳에서 잠시 머물다 우리의 목적지인 분식집으로 향했다. 분식집에는 주인 할머니의 건강상의 이유로 가게를 매일 열지 못한다고 쓰여진 종이가 붙어있다. 아주머니는 늙어 할머니가 되셨지만, 음식 맛은 그대로였다. 동생과 집에 가면서 또 오자고 이야기했다.
“인생 뭐 있어? 가고 싶은데 가고 먹고 싶은 거 먹는 거지.”
갈 수 있을 때 좋은 기억이 있는 장소를 자주 가봐야겠다. 지난주에는 어렵게 시간을 내어 롯데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사직구장에도 다녀왔다. 시간을 내고 에너지를 쓰고 돈을 들여 즐거운 공간에 가는 것. 나는 그런 일에 가치를 두기로 했다. 즐거울 수 있을 때 즐거움을 한껏 누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