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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Sep 30. 2024

9회말 2아웃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선수인 요기 베라는 많은 어록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이다. 야구는 축구나 농구처럼 경기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잡힐 때까지 경기 결과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비슷한 뜻으로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말이 있다. 크게 뒤지고 있더라도 언제라도 역전할 수 있는 게 바로 야구의 재미다. KBO리그에서는 프로야구가 시작된 1982년부터 2022년까지 657차례 9회말 끝내기 안타가 나왔다. 9회말 2아웃 이후 나온 끝내기 안타도 294 차례나 있었다. 아무리 좌절해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야구를 보면 깨달을 수 있다. (‘대충 봐도 머리에 남는 어린이 야구 상식’ 중)     



24년 프로야구 정규 시즌이 시작되었다. 야구 유튜브와 야구 소설, 영화로 버텼던 비시즌 기간이 끝났다. 개막 일주일 전쯤에 롯데 자이언츠 유튜브 채널인 자이언츠 TV에 새로 온 선수들의 응원가가 올라왔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정규 시즌 스케줄을 확인했더니 직관 갈 수 있는 서울 및 수도권 구장의 롯데 경기가 많지 않다. 다행히 개막전을 인천 문학구장에서 한다. 바쁜 일정을 조절해서 개막 다음 날 직관을 갈 수 있었다.



직관을 가는 건 꼭 여행 가는 것 같다. 먹을 것과 응원 도구, 유니폼을 챙긴다. 평소 하숙생인 줄만 알았던 사람들과 대화하며 '우리가 가족이었군' 하고 느낀다. 선수 라인업을 보며 '어떤 선수가 없네', '선발 투수는 누구네', '문학 구장 맛있는 치킨이 뭐였더라' 하는 별 것 아닌 대화를 하며 하하 웃는다.     



롯데와 SSG와의 경기. 5회에 SSG가 2점을 뽑으며 앞서갔다. 7회에 또 3점을 내준다. 스코어는 0:5로 벌어졌다. 8회 말에 또 한 점을 내주고 나니 많은 사람이 짐을 챙겨 자리를 뜬다.

"아니, 왜 집에 가는 거야? 이기는 경기를 보러 온 거야?"

"우린 새 선수들 응원가 부르러 왔잖아."

"그럼, 우린 그냥 응원가 부르고 선수들 응원하러 온 거지. 그치?"

우리 가족은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정신 승리를 한다. 스코어는 6점차. 9회 초가 되었다. 롯데의 마지막 공격이다. 그때 내가 바랐던 건 이기는 게 아니라 한 점만 내는 거다. 그냥 이렇게 끝나면 다음 날은 경기가 없는 월요일인데, 선수들도 팬들도 아쉬울 것 같다.

"한 점만, 한 점만."     



9회 2아웃 상황. 드디어 기다리던 한 점이 났다. 롯데 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흡사 롯데가 SSG를 역전한 분위기다. 내 딸은 짝짝이(흔들면 박수가 쳐지는 응원도구)를 하도 흔들어서 중간 부분이 부러졌다. 곧이어 안타와 홈런이 연이어 터져 6대 6 동점을 만들었다. 말로만 듣던 마지막 공격 찬스에서의 

득점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을 눈으로 본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9회 말, 끝내기 홈런을 맞았다. 그렇게 경기가 끝났다. 아쉬웠지만 그래도 뒷심이 부족했던 롯데가 변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내가 갔던 대부분의 직관에서 롯데는 이기다가 나중에 역전당할 때가 많았다. 가끔은 '뒷심이 부족한 게 나와 비슷하군' 하면서 동병상련의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이날은 졌지만 달랐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준 롯데 선수들에게 고마웠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한 마디했다.

"이게 바로 졌잘싸지."

딸과 나는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승패와 관계없이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나도 뒷심을 키우고 싶어졌다. 성취와 상관없는 그런 태도를 말이다.     



난 업무를 받으면 호기롭게 계획을 세우고 해나가다 마감이 가까워 오면 이걸 언제 다 하나, 하고 한숨 쉴 때가 많다. 공모전에 글을 응모할 때도 초고는 어찌저찌 쓰는데 다시 퇴고할라치면 그 과정이 너무도 고단해 ‘몰라, 몰라’ 하며 출력한 원고를 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상상 속에서는 정말 수도 없이 종이를 구기고 던졌다.      



이런 나에게 뒷심을 키워주는 유일한 활동은 바로 달리기다. 학창 시절엔 몸치라 운동을 멀리했는데 재수하면서 몸을 움직이면 생각이 정리되고 맑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치라고 놀리는 친구도, 체육 선생님도 없는, 달리는 그 시간이 그 시절의 나를 지켜주었다.  그러고는 이런 저런 운동을 전전하다 코로나 시기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수영장도 헬스장도 문을 닫아 갈 수 없었지만, 밖에서 달릴 수는 있었다. 팔과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면 내가 살아있는 게 느껴진다. 기고 걷고 뛰고 달리는 건 사람의 발달상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러니 몸치도 달릴 수 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기회가 될 때마다 10킬로미터 마라톤도 참여한다. 얼마 전, 서울하프마라톤 10킬로미터(K) 부문에 참가했다. 10킬로미터가 뭐가 힘드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내가 뛰고 싶을 때 뛰는 10킬로와 대회 10킬로는 다르다. 정해진 코스가 있고 정해진 시간이 있다. 집에서 혼자 모의고사 문제집을 푸는 것과 시험장에서 시험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도착해 보니, 이미 먼저 온 사람들이 많다. 간단히 몸을 풀고 나니 개회식이 시작됐다. 그 뒤 이어서 준비운동을 한 후, 진행자의 출발 신호에 맞춰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바른 자세를 다시 한번 되뇐다. 허리를 세우고 어깨에 힘을 빼고 보폭은 너무 넓지 않게. 내 앞에 안정적으로 천천히 뛰는 사람을 한 명 정해서 그 사람과 발을 맞춘다. 하나, 둘, 하나, 둘.    


 

 항상 생각한 것보다 1킬로는 멀다. 체감상으로는 한참 전에 지났어야 하는데, 내가 1킬로 팻말을 못 보고 그냥 지나쳤나. 하고 의심할 때쯤 1킬로 팻말이 나온다. 2킬로도, 3킬로도 마찬가지다. 나만 빼고 다 빠른지 모두 슉슉 나를 추월해 간다. 3킬로 부근에서부터 뱃속이 심상치 않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 식은땀을 흘리며 괄약근에 힘을 주며 뛴다. 내가 왜 또 대회에 참여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5킬로가 넘어가면서는 다행히 뱃속 사정은 괜찮아졌다. 그러나 다리 사정이 좋지 않다. 나는 멈추고 싶다. 공덕역을 지나 다리를 건너고 여의도 공원 옆을 지나간다. 도착지가 여의도 공원이라 거의 다 왔다.. 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9K표시가 보일 줄 알았는데, 엥? 8K 표시가 보인다. 이게 뭐람. 2킬로가 더 남았다고?    


  

그럴 때 내가 하는 생각은 ‘걷지만 말자’다. 걸으면 다시 뛰기가 힘들다. 그렇게 겨우 겨우 뛰고 있을 때 응원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온몸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는다. 덩달아 내 삶을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연상되면서, 그들이 있어서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지. 하는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그 마음으로 기운을 낸다.  9K 표시가 나타났다. ‘마지막 1킬로니까 힘을 내자.’ 하는 생각에 팔을 앞뒤로 휙휙 젓는다. 자동으로 뛰는 속도가 빨라진다. 골인 지점이 보이면 전력 질주를 한다. 내 몸 어딘가에 있던 힘을 짜낸다. 뒷심을 발휘한다. 결승점을 통과하고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혼자 흐흐흐 웃는다. 나는 사실 숨겨진 뒷심이 있는 사람이었어.      



롯데도 사실 숨겨진 뒷심이 있는 팀이었다(퇴고하는 시점에는...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숨겨진 뒷심이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하자). 그날 경기 이후 나온 기사를 보니 롯데의 개막전 2연패가 아쉽다는 내용이 많다. 무거운 마음으로 다음 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그날 직관을 다녀온 사람으로서, 롯데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롯데가 숨겨진 뒷심을 발휘할 수 있도록 안 풀리는 야구를 하고 있을 때 힘을 줄 응원은 필수다. 롯데팬들이여, 쓴소리도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선수들에게 힘을 주는 응원을 하자. 응원의 힘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오늘 한 경기가 끝이 아니다. 인생도 야구도 계속된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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