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누리자
한국 프로야구의 10개 구단이 정규시즌 동안 얼마나 잘하는지에 대한 순서. 매 경기 결과에 따라 변동이 있을 수 있어 경기 후 검색창에 ‘KBO 순위’를 입력해 응원팀의 순위를 확인하는 것이 나의 루틴이다. 한국 프로야구는 롯데 자이언츠(부산), 두산 베어스(서울), LG 트윈스(서울), 키움 히어로즈(서울), SSG 랜더스(인천), KT위즈(수원), 한화 이글스(대전), KIA 타이거즈(전라남도 광주), 삼성 라이온즈(대구), NC 다이노스(창원), 이렇게 총 10개 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응원팀인 롯데 자이언츠를 제외하고 우리 집과 가까운 순서대로 나열했다) 2023년 4월 롯데 자이언츠는 봄데(봄에 잘하는 롯데)라는 별명에 걸맞게 KBO순위 1위를 기록했다. 그 이후의 기록은 생략한다.
결혼 전, 남편에게 한 거짓말 두 개가 있다.
남편과는 소개팅으로 만났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남편은 술을 즐긴다면서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전 식사하면서 맥주 한두 잔 정도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씨도 그런 걸 좋아하시나요?”
난 피부 알레르기가 있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가 뭐가 마음에 들었는지 “네. 저도 맥주 한 두잔 하는 거 좋아해요.”라고 말했다.
그 뒤에 또 이어진 질문.
“야구 좋아하세요? 전 야구 보는 거 좋아하거든요.”
뇌를 거치지도 않고 바로 대답이 나갔다.
“네, 좋아해요. 어떤 팀 좋아하세요?”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야구를 좋아하다니, 대체 누가? 내 동생이 옆에 있었다면 배꼽을 잡고 깔깔 웃을 일이다. 아빠를 따라 야구장을 몇 번 간 적이 있지만,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그러나 난 합리화한다. 맥주는 특별한 경우에는 마시니까 거짓말이 아니고, 야구는 이제부터 좋아할 거니까 거짓말이 아니다.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야구를 보기 시작했다. 아빠가 응원하던 기아가 아니라 남자 친구의 응원팀인 롯데로 바꿔서.
그 뒤 남자 친구는 남편이 되었고 우린 함께 야구를 봤다. 주말엔 종종 직관도 갔다. 아이를 낳은 후에는 하이라이트로만 야구를 보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간 후에야 다시 직관을 갈 수 있었다. 아이는 야구장에 오면 치킨이나 과자 등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아했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졌고 코로나는 끝날 듯 끝나지 않고 3년이나 이어졌다.
일상으로 돌아간 23년 봄. 갑자기 롯데가 잘한다. 9연승이라니, KBO순위 1위라니. 이게 무슨 일이람!
“우리 팀이 이렇게 잘하는데 직관 한 번 가야 하지 않겠어?”
남편은 옷장 깊숙한 곳에서 롯데 유니폼을 꺼냈다. 남편도 나도 오랜만의 직관에 들떴다. 치킨을 사주겠다고 하니 집순이 딸도 좋단다.
오랜만에 야구장에 간 우리의 자리는 응원석 바로 옆이다. 코로나 기간에 집에만 있다 집순이가 되어 버린 딸이 이 시끌벅적한 공간을 좋아할지 모르겠다. 우리 팀 공격 순서에 자리에서 일어나 어색하게 응원 동작을 따라 하는데 남편이 귓속말로 물었다.
“시내가 야구장 좋아하는 것 같아?”
“아직 잘 모르겠어.”
사춘기 딸은 엄마 아빠와 함께 노는 것보다 친구들과 노는 걸 더 좋아한다. 부모에게서 서서히 독립해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마음은 서운하다. 아이와의 한 시절이 또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아쉬움. 육아 집중기를 지나 이제 좀 말이 통하나 싶었는데 어느새 사춘기가 되었네, 하는 섭섭함.
6회였었나, 응원가를 어설프게 따라 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엄마, 야구장 재밌다.”
난 아이를 보고 씩 웃었다. 그리고 아이의 말을 바로 옆에 있는 남편에게 귓속말로 전했다.
“시내가 야구 재밌대.”
남편도 나를 보고 웃었다.
내가 모르는 아이의 세계가 점점 넓어진다. 학교에 다녀와서 조잘조잘 얘기하던 딸은 이제 없다. 아이의 방문은 열려있을 때보다 닫혀있을 때가 더 많다. 그러다가 함께 온 야구장. 아이는 아빠에게 묻는다.
“지금 왜 아웃 된 거야?”
“공이 땅에 튀기지 않고 한 번에 잡았잖아. 그래서 아웃. 그리고 저기 전광판을 보면 아웃 카운트가 몇 개 있는지 알 수 있는데 말이지…….”
남편은 오랜만에 아이와 이어지는 대화를 한다. 아이가 묻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알려준다. 아이의 질문은 계속되고 둘의 대화는 길게 이어진다.
그다음 날부터 아이는 매일 KBO 순위를 찾아보며 순위 변동 상황을 나에게 알려준다. (신기하게도 분명 1등이었는데 그날 이후 순위가 계속 하락한다) 유튜브를 보며 롯데 자이언츠 응원가와 응원 동작을 익히고 내 핸드폰에도 롯데 자이언츠 앱을 깔았다. 아이가 요즘 가장 많이 보는 유튜브는 ‘자이언츠 TV’이고 제일 많이 보는 TV 프로그램은 야구 중계다. 아이돌 굿즈존은 롯데 자이언츠 굿즈존으로 바뀌었다. 아이는 거실에서 야구를 본다. 온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고 야구 중계를 보는 시간이 즐겁다. 이제는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안다.
얼마 전, 지갑 안에 있던 아이의 다섯 살 때 증명사진을 우연히 봤다. 처음 여권을 만들때 찍은 사진이다. 또랑또랑한 눈, 동그란 코, 앙다문 입술. 사랑스러워 눈을 뗄 수가 없다. 온 가족이 함께 사진관에 가서 찍었던 생각이 났다. 아이는 커다란 사진기 앞에 혼자 앉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자기야, 이 사진 좀 봐!”
남편을 불렀다. 남편도 한참 동안 아이의 사진을 본다. 그러더니 딸에게 “얘 어디 갔어? 얘 좀 데려와.”라고 농담을 했다. 딸은 뾰로통한 얼굴이 되어 남편과 나에게 말했다.
“걔는 이 세상에 없어.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야.”
아이의 말이 서운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사실 지금 아이의 모습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몇 년 뒤엔 또 지금의 아이가 그리울테니 아이의 사진을 많이 찍어두어야겠다. 다행히 온 가족이 함께 야구장에 다니며 아이와의 사진이 늘어났다. 함께 하는 대화도 늘었다. 그러나 아이의 흥미가 언제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갈지 모를 일이다. 그때 아쉽지 않도록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기며 누려야겠다. 중요한 건 바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