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담아 바람에 실어 보내요.
창밖의 야경이 참 멋지다. 버스 안은 약간 후덥지고, 답답하지만 높은 건물과 공원 너머의 불빛들이 서울의 밤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일기를 쓴다. 일기를 쓰는 이유가 글을 연재하기 위한 것인지 오늘의 소회를 진심으로 담고 싶었던 것인지 헷갈린다. 나의 마음에 빗장을 풀고 나서부터 봇몰처럼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요즘은 부끄러움도 잊은 듯하다. 어디에도 전할 곳이 없어 현실을 넘어 가장 가까운 강물에 둥둥 띄워 보내고 있는 걸까. 뒤돌아서면 개운하기보다는 초조하고 애가 탄다. 너무 투명한 속내와 깊게 숨겨둔 마음이 여과되지 않고 표출된 것 같다. 때로는 옅은 색의 진심이 더 예쁘게 보이는 법인데 말이다.
글이 좋았던 이유를 더듬어 본다. 이 순간에도 시간을 내어 몇 글자라도 생각을 옮기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아마 고등학생 때, 신문사의 칼럼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인 것 같다. 한 주제로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보여주다가도 비유와 풍자로 비판을 넘나드는 사고력과 문장력이 멋있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그런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생각에만 멈춰 섰고, 작문 실력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작가들의 꾸준한 글쓰기 훈련과 생활 곳곳에서 소재를 발견해 내고 마는 예민한 관찰력을 생각하면 그들의 글근육이 얼마나 발달했을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비판과 비유가 글의 전부라 믿었던 나에게 양귀자 작가님의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과 박완서 작가님의 <박완서의 말>은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을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돌려놓았고, 사람과 관계에 대한 고민들도 한 편의 글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었다. 반복되는 일상에도 달리 보이는 인물들이 있었고, 흐르는 세월을 거슬러 그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연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한 것인지를 느끼게 했다.
사람과 관계가 고민의 중심에서 글의 주제가 된 건 그것들이 어려워 혼자 끙끙 앓았던 나의 모습을 투영한 것도 있겠지만, 말로 뱉지 못하는 마음을 글로 풀어낼 때 진정으로 나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글에는 나의 편협한 마음만 소비되어 편치 않았고, 또 어떤 글은 쓰는 내내 가슴이 벅차올라 코끝이 찡할 때도 있었다. 글을 쓸 때마다 다듬는 단어와 문장들이 날 것의 나를 빤히 비추는 것 같아 다 쓰고 난 글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글을 쓰는 삶을 잇고 싶다. 마음의 빈 곳을 만들어 주고, 그곳에 생각과 감정을 채우는 습관을 키워주는 이 날들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다. 내가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가장 특별한 선물 같다. 누군가를 해치지 않으면서 미워할 수 있고, 또 누군가를 가장 아름답게 칠할 수 있는 기분 좋은 일이기도 하다.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다는 영화 대사가 떠오른다. 비록 들켜 보고 싶었던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남기는 일이지만, 멀어져 가는 옅은 노을의 색으로 읽는 사람의 마음에 고이 전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