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 행위의 탐구자들 ① ‘관객 없애기’를 시도한 해리엇 핀레이 존슨
최지영의 연극놀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극적 행위를 강력하게 인식하고 만나게 된 그 순간, 연극놀이 이끔이로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그 정체성을 이루어내는 극적 행위에 대한 정리 등에 대해 짚어보았다. 이제는 실제로 필자에게 구체적인 영향을 미친 극적 행위의 탐구자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초점은 그저 역사적인 맥락을 정리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들이 연극놀이 이끔이로서 어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정체성이 필자에게는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극적 행위의 탐구자들, 그 첫 번째 인물로 영국 교실드라마(classroom drama)의 선구자인 해리엇 핀레이 존슨(Harriet Finlay-Johnson, 1871~1956)을 만나보고자 한다.
“어린시절이란, 장차 닥칠 어두운 시절을 대비해 대용량의 햇빛을 저장해두는 시기라고 말한다면, 내가 틀린 것일까?”
존슨의 이 언급을 통해 그녀가 교사로서 품고 있던 꿈과 열정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내가 틀린 것일까”라는 질문도 함께 던졌을까?
존슨은 1897년부터 1910년까지 서섹스 근처 솜팅학교의 교장으로 근무했다. 이 학교는 2개 학급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교장 한 명과 직원 한 명이 전부였다. 공립이 아닌 사립, 지금의 대안학교 성격의 학교였다고 추측된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중후반까지 한 학교에서 자신의 질문과 탐색을 쏟아내었을 것이다. 또한 이 시대는 곧 닥쳐올 1차 세계대전(1911~1918)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면서, 산업주의로 야기되는 인간들의 이기심과 전쟁의 현실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모색도 함께 이루어진 역사적 맥락 속에 있는 시기였다. 또한, 영국에서도 교실에서의 드라마 활동에 대한 시도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존 듀이에 의한 예술과 교육에 대한 통합에 대한 실험도 한창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다. 존슨 역시 이러한 맥락의 영향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교실드라마에서의 극적 행위(Acting in Classroom Drama)』(1998)의 저자인 개빈 볼튼(Gavin Bolton)은 존슨이 교육에 있어서 ‘배움의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학생들을 ‘학자들’로 호칭했고, 학생들에게 지식에 대한 열망을 끌어내는 데 있어서, 드라마 활동이 매우 효과적임을 발견했다고 존슨의 말을 통해, 그 단서를 제시하고 있다.
“연극을 교사들이 시작하고 이끄는 대신에, 아이들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 어른의 관점에서 볼 때 아무리 조잡한 연기이고 대사일지라도, 이것은 아이들의 정신 발달단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어른들의 고양된 시각을 즐겁게 하는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표현하고 동화(expression & assimilation)하도록 하는 매우 가치 있는 장치(수단)이다.”(개빈 볼튼의 책에서 인용, 번역 오판진, 김주연, 2012)
존슨은 극화의 과정을 이끌어감에 있어서, 학생들이 스스로 주제에 맞는 필요한 대본을 찾고, 선택해서, 순서를 바꾸는 등 새롭게 대본을 쓰도록(학생들 스스로 재해석하여)하는 연속적인 패턴을 제시하였다. 또한 연속적인 패턴의 마지막 단계는 발표였다. 그래서 고전 대본을 연습하는 방식-리허설과 발표-을 그대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존슨은 학생들에게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 연기지도 등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에 그 발표나 리허설을 더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연습하기보다는, 더 나은 공부를 위한 ‘스스로 배우기’와 같은 대안적인 교실 활동이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발표과정은 학생들이 극화 과정을 통해 새로 획득하게 된 지식을 펼쳐 보이는 마지막 단계로서 작용하도록 했다. 이러한 점에서 개빈 볼튼은, 존슨이 이끌었던 극화 과정을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지식의 소유권’(ownership of knowledge)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존슨은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았음을 밝히면서)
이처럼 결과와 과정의 관계 속에서 존슨이 인식하고 실행한 것은 드라마를 통한 과정 자체에 대한 탐색이라기 보다는, 드라마를 통해서 학생들이 얻게 되는 가치를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행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결과, ‘보여주기 위한 연기’를 없애는 것! 곧 관객이라는 장치를 ‘스테이지 매니저’ 혹은 ‘논평자나 관찰자’로서 제안하면서, 교과과정 전체를 운영했다.
존슨은 철저하게 학생들이 성취할 것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고민하고 실천했다. 그 결과, 연속된 패턴을 통한 ‘과정중심 장면만들기’의 체계를 시작한 것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학생들(참여자들)과 함께 연극만들기를 진행할 때, ‘장면 만들기(play-making)’와 ‘공연하기(paly-performing)’에 대한 혼란과 착각에 자주 마주하곤 한다. 장면을 만들어낸 것이 곧 공연하기는 아니다. 그런데 학생들뿐만 아니라 연수에서 만난 대다수의 교사들이 그저 장면을 만들어냈으면, 그것을 그대로 올리기만 하면 공연하기/발표하기가 저절로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흔히 만나게 된다.(솔직히 이러한 현상은 교사나 예술강사 등 대부분의 이끔이들에게 발견되곤 한다) ‘장면만들기’와 ‘공연하기’(발표하기를 포함하는)는 다른 단계이다. 장면만들기와 마찬가지로 공연하기 또한 참여자들의 인식과 발표에 대한 전략과 과정이 필요하다. 20세기 초, 드라마 활동에 대한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실천을 해내었던 존슨이 새삼 위대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진정한 연극놀이 이끔이의 선구자라 하겠다.
여기서 “내가 틀린 것일까?”라는 그녀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녀의 이끔이로서의 정체성은 철저하게 학생(참여자)들의 욕구를 자극하기 위한 질문자이자 탐색자였다고 하겠다. 한번 더 강조하자면, ‘내가 틀린 것일까’라는 질문을 탐색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통로이자 수단이 드라마 활동이었음을!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몰입과 탐색의 가치를 최초로 진지하게 실천한 인물이 바로 해리엇 핀레이 존슨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