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소믈리에가 무엇이길래
소믈리에라는 직업은 주로 음료와 관련된 직종에 많이 붙는 일종의 직업적 명칭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차와 관련된 직업에는 티소믈리에, 티마스터, 티 블랜더, 티 큐레이터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나는 티소믈리에가 내게 맞다고 생각했다. 차와 관련해서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중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것도 티소믈리에다.
차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알리는 일을 하면서 그중 나는 강의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일을 하다 보면 꼭 강의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차 강사, 차 선생님 등으로 불리지만, 나 스스로를 그렇게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회사에 다니면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티소믈리에 자격증이라는 것을 따게 되었는데 그때는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스리랑카로 여행을 다녀온 이후, 그곳에서 마셨던 홍차가 너무 맛있어서 차가 궁금해지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그래서 그저 차에 대해 배우고 싶어 다닌 곳에서 자격증도 주어 받았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 쯔음 회사를 더 다닐지 말지 생각이 들던 때라, 이 자격증이 있으면 티룸에 알바라도 쉽게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은 있다.
회사 일도 늘 많았고, 야근도 많았던 터라 주말에는 꼭 낮 12시가 넘어서까지 몰아 자거나, 주말 중 하루는 보통 회사에 나갔어야 했다. 그렇게 육체적으로 참 힘들었었는데 이상하게 그땐 차가 배우고 싶어 주말 수업을 과감히 신청했다. 회사일은 도통 끝나지 않아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입버릇처럼 말하며 만성피로를 달고 있던 사람이었던 내가 무언가를 더 배운다니. 고작 입사 첫해, 주말에 딱 두 시간만 필요했었던, 그 좋아했던 포르투갈어 과외도 때려치웠던 마당에 뭔가를 새롭게 배운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근데 차는 뭔가 내 마음속의 방아쇠를 오랜만에 당긴 존재였다.
그렇게 몇 달을 다닌 후, 티소믈리에라는 자격증을 받았다. 하지만 자격증 과정을 거치고 자격증을 받는다고 해서 결코 내가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예전에는 어떠한 자격증이 있다고 하면 전문적으로 보이고 다른 누구보다도 훨씬 능숙하게 알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아니었다.) 몇 달 동안 수업을 듣고 시험도 통과해 티소믈리에 자격증을 받았지만, 나는 티소믈리에가 아니었다. 시험 통과 후 잠시 뿌듯함을 느껴졌을 뿐, 난 오히려 더 부족한 나의 모습이 내보여져 어디에다 대고 내가 티소믈리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점점 가득해지더니, 차에 대해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도대체 차를 어디에서 공부하고 경험할 수 있는지 막연했었다. 그저 그때는 우리나라가 커피를 많이 마시니까 차 시장이 상대적으로 작아 그런 거겠지 싶었는데 아니었다. 자격증을 따고 나니 여기저기 차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생각보다 많았다. 차에 관련된 책도 커피 서적보다는 적었지만, 읽고 싶은 책들이 꽤나 있었다. 역시 아는만큼 보이는 것이였나보다.
나는 현재 자격증을 발급하는 수업을 하고 있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종종 차를 더 공부하고 싶은데 어디에서 선생님처럼 자격증을 딸 수 있는지 묻는 수강생들이 있다. 그럴 때 나는 자격증이 꼭 필요하신 거 아니면 책이나 다른 차 선생님들의 수업을 두루 들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씀드린다. 물론 이렇게 나의 의견을 전한다고 해도, 자격증이 있어야 좀 더 든든한 마음이 드시는지 자격증을 발급해 주는 곳으로 가시기도 한다.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도 자격증에 대해 조금은 회의적이지만, 자격증을 따는 과정에서 잘만 공부한다면,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라면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지나와보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격증은 마침표가 아니라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마라톤으로 치면 이제 막 러닝화에 운동복을 갖춰 입고, 대회를 나가기 위해 연습하고 있는 그 시점 정도라고 할까?
어쨌든 그렇게 처음으로 "저 티소믈리에예요"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갖춰지고 나자, 난 차가 더 궁금해졌다. 조금씩 차를 혼자서 배워가고 마시던 중 이젠 정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시점이 왔다. 그래서 결심했다. 5년 동안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 퇴직금을 가지고 차 여행을 떠나기로!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나는 그냥 유명한 곳만을 찾아 다니는 그런 여행은 가기 싫었다. 당시 차로 무언가를 하고 싶단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테마로 간다면 이왕 가는 여행 더 재미있게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렵, 좀 더 차를 공부해보기로 했다.
차를 테마로 생각한 나라 중에 당연히 홍차의 나라 영국도 빠질 수 없었다. 그곳에 가면 좀 더 차를 더 제대로 마시고,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거란 확신도 들었다. 사실은 당시 영국보단 프랑스를 더 좋아해 차를 그곳에서 배우고 싶었지만, 모든 수업이 프랑스어로 운영된다고 하기에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렇게 찾은 영국에 있는 차 교육기관을 찾아보니 세상에 내가 이름으로만 들었던 유명한 분이 티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계신 게 아닌가. 그래서 주저 없이 그곳의 차 수업을 등록했다. 책으로만 만났던, 그리고 나보다 먼저 영국에서 그 선생님의 만난 이야기를 담은 블로그로 그렇게 간접적으로 만난 분인데 선생님의 수업을 직접 들을 수 있다니! 수업 전까지 얼마나 신나고 떨렸었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소믈리에라는 타이틀로 활동하겠다 결정한 것도 그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한 번은 수업 중에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은 스스로를 뭐라고 칭하시나요?"
선생님은 원래 불어를 가르치다가, 차가 좋아 티룸도 하시고 수업도 하시면서 여러 권의 책을 내시며 다방면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분이다. 차 교육과 책을 쓰는 것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쓰시지만, 전 세계를 돌아다니시며 티 페스티벌의 심사위원이나 자문 등으로도 많이 활동하셨다.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는 티소믈리에 정도가 좋겠어요. 저한테 티 마스터는 과분한 타이틀이고요. 티소믈리에 정도로 할게요."
딱히 본인의 타이틀을 내세우시지 않으셨던 분이라 잠깐 고민하셨나 보다. 또 다른 학생이 티 마스터에 대해 묻자 이렇게 대답하셨다.
"전 티 마스터가 될 수 없어요. 저는 차로 교육도 하고 차로 다양한 활동도 하지만 티 마스터는 아니에요. 티 마스터는 차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데, 저도 여러분에게 이야기해 줄 정도는 알고 있지만 저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차를 직접 재배하시는 분들, 그분들은 티 마스터라고 해도 되겠네요."
선생님은 수업을 하시면서 차를 제대로 잘 재배하는 분들에 대해 매번 높이 산다는 말씀을 아끼시지 않았는데, 그 마음이 여기 투영된 것 같았다. 나도 이전에는 그저 차를 만드는 분들에 대해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선생님 덕분에 나의 자세가 달라졌다. 그분들이 좋은 차를 만들어주셔서 우리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분들 없이는 우리도 이렇게 차에 대해 강의를 하거나, 차를 즐기거나, 지금 이렇게 차에 대해 쓰지도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도 그럼 티소믈리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언제쯤 선생님처럼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나의 직업적인 타이틀은 티소믈리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심하고 난 지금, 난 티소믈리에로 되어 티소믈리에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티소믈리에를 나만의 언어로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 티소믈리에 (Tea Sommelier)
: 차에 대해 전문적으로 알고 전하는 사람,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차를 접할 수 있도록 돕고 그 사람들이 그들만의 차에 대한 취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무엇보다도 차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