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말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나의 삶은 폐허였다. 진도 7 이상의 대지진이 일어나 삶을 완전히 휩쓸고 지나가버린 뒤였다. 그땐 어느 누구와도 관계 맺기가 어려웠다. 모든 게 무너져 내린 폐허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나를 최대한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자조하고 있었다. 살아야 하니 살았고 죽을 용기가 없어서 살았다. 어느 날 그런 내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하지만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스쳐 지나갈 수많은 인연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에겐 사랑도 사치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까지도 내 곁에 남아 있다. 운명은 언제나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손을 내민다. 뜻밖의 인연을 이어주기도 하고 믿었던 인연을 끊어버리기도 한다. 나는 아직까지도 인연에 대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도 인연이 주는 상처와 행복 사이를 무수히 오가기만 할 것이다. 우리는 같은 출판사에 근무하는 동료였다. 그는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사람이었다. 나는 교사 경력을 인정받아 대리로 입사했고 그는 갓 들어온 신입사원이었다. 나는 국어과였고 그는 과학과이다 보니 출판사에서 오가다 인사를 나누는 게 전부인 사이였다. 그런 그가 나에게 호감을 표현했고 나는 어린 동생의 호기심을 어떻게 물리쳐야 할지 몰라 고민만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내가 사는 빌라 앞으로 찾아왔다. 동원 훈련을 받은 날인데 환복을 못 했다면서 훈련복 차림 그대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의 앳된 얼굴을 더욱더 어려 보이게 만드는 푸르스름한 훈련복과 한껏 힘을 준 목소리에서 새어 나오던 미세한 떨림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멋있다거나 매력적이라기보단 귀엽다거나 순수하다는 단어가 더 어울릴 법한 사람이었다. 교사 시절, 남학생들이 젊은 여교사인 내게 보냈던 거친 관심과 어설픈 애정이 떠올랐다. 곧 있으면 사그라들고 말 마음의 불을 어떻게 하면 조용히 그것도 재빠르게 꺼트려버릴 수 있을지 고민하며 그와 마주했다. 그런데 그날, 그는 쓰나미처럼 나를 덮칠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떤 대화의 끝에 그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둘만의 첫 만남이나 마찬가지인 자리에서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평생 책임질 수 있어요. 제가."
이게 뭔 유치하고 황당한 사랑 고백이란 말인가. 나는 그만 풋 하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그의 진지한 표정에 놀라 얼른 주워 삼켰다.
'이 열혈 청년은 나란 여자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도대체 무얼 보고 내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거지? 아직까지 세상의 쓴 맛을 하나도 보지 않았나 보다. 순진한 이 남자를 어떡하면 좋지?'
나는 그의 고백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순수하고 거침없는 그가 왠지 모르게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이상하게 그의 바보스러운 호언장담이 좀처럼 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 게 아닌가?
그때 나는 삼십 대 초반이었다. 인생을 안다고 하기엔 한참 어린 나이였다. 무언가를 자신하거나 확신하는 게 어려웠고 사랑이란 것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나 자신조차도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7년 여를 다니던 교직을 그만두고 수녀원에 들어갔지만 거기서도 도망치듯 뛰쳐나오고 말았다. '패배자라는 딱지'를 붙인 채 먹고살기 위해 작은 출판사에 들어갔다. 꿈도 희망도 없는 날들을 보내며 삶을 무책임하게 소비하고만 있었다. 나는 나이에 비해 너무 빨리 늙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나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듯한 그는 마치 다른 별에서 온 어린 왕자처럼 신선하고도 색다른 충격을 주었다.
어리고 순진하지만 열정과 용기가 있어 보였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은 덜 익은 과일처럼 풋내가 났지만 터질 듯이 생기로웠다. 모든 걸 비관하고 있던 내게 그는 마치 한 줄기 빛처럼 보였다. 그 빛의 진위 여부를 따져보지도 않고서 내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투명하고 얇은 유리는 금방 깨어지기 쉽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했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기로 한 것이다. 나는 빛을 보고 덤벼드는 불나방처럼 본능에 이끌려 그가 내뿜는 빛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내 삶도 빛으로 가득 찰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그 빛은 내 몸을 태워 없애버리고 말 위험한 불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패기 가득한 호언장담은 사랑에 눈먼 자가 뱉은 허세일 뿐이었다. 실상 그는 빛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와 너무나도 닮은 사람이었고 어쩌면 나보다도 황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내가 그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난 후였다. 나를 책임지겠다는 그의 말을 믿고 사랑을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의 밝음과 순수함이 꺼져가는 나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믿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서 빚어낸 환상에 기대어 섣불리 인연을 맺었던 것이었다.
그가 우울증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목격한 이후로 나의 기대는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내가 잡았던 구원의 동아줄은 썩은 동아줄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동반 추락하고 말았다. 사람을 통해 내 삶을 구원받으려 했던 나의 욕심이 얼마나 헛되고 이기적인 것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물론 그때 당시엔 실망감이 너무 큰 나머지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내 삶은 늘 제자리일 뿐이구나.'라는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그의 고통을 먼발치서 외면했다. 그의 고통이 내 폐부를 뚫고 들어오기에는 우리 사이가 그리 가깝지도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조금 잔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아픔에 온전히 공감하기보다는 나의 비참한 처지를 더 동정하고만 있었으니까.
고통이 심해지자 그는 도망치듯 내 곁을 떠났다, 그리고 한 달여만에 나를 다시 찾아왔다. 그간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엉망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동정심과 연민이 일어났지만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리의 인연은 거기서 그렇게 끝이 나고 마는구나 생각했다. 안절부절못하며 망설이고만 있던 그때, 그가 먼저 내게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결국 우리의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