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부부가 탄생했다
팍팍한 서울 살이에 지친 우리는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한 가지 환상을 품고 있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도 깨끗하고 예쁜 집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철부지 같은 꿈을 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발령에 맞춰 이사할 집을 알아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였는지 깨달았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이었지만 소도시 아파트라고 해서 억이 넘지 않는 집은 없었다.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전세를 구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일단 급한 대로 그의 직장에서 제공해 준다는 '관사'에 들어가 살기로 결정했다. 얼핏 보면 당장에 목돈이 들어가지 않으니 참으로 현명한 선택 같아 보였다.
회사에서는 아주 오래된 빌라를 직원들에게 관사 용도로 제공해 주고 있었다.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신축 빌라는 직급이 높은 사람들이 한 칸씩 차지하고 있었다. 살림도 하지 않고 주중에만 가끔 머무는데도 그들에겐 더 넓고 깨끗한 집이 제공되었다. 이제 갓 들어온 신규 공무원에게 그런 혜택이 돌아올 리는 없었다. 우리가 살 관사는 너무 낡아서 당장 보수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욕실 문도 제대로 닫히지 않았고 주방이나 안방 어디를 봐도 낡고 더럽고 찌든 때가 잔뜩 했다. 나는 서울의 시장통 원룸보다 못한 그곳에서 도저히 살림을 차릴 수는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돈은 없지만 도배하고 장판하고 화장실만이라도 고치자."
"관사이니 돈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거 알지? 살다 나가면 그걸로 끝인 거야."
"그래도 이 상태론 도저히 안 되겠어."
아깝지만 사비를 들여 간단히 인테리어를 했다. 그나마 돈을 조금 들이니 흉측한 몰골은 면한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단순히 집의 외양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왜 그 집을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신규 공무원에게 내주었는지 납득이 될 정도로 살기가 불편했다. 겨울에는 아무리 난방을 돌려도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로 추웠고 여름에는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지 미친 듯이 많은 모기들이 들끓었다. 어느 날은 하도 이상해서 작정을 하고 바로 아래에 있는 지하실 문을 따고 들어가 보았다. 그랬더니 세상에나 지하실의 절반쯤이 물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왜 그렇게 추웠고 모기가 많았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집이 허름하고 낡았다는 것은 실상 큰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관사에서 살기 시작한 지 반년쯤 지나자 거의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애초에 관사에서 살기로 한 결정을 엄청나게 후회한 것은 물론이고 그런 곳에서 나를 살게 한 그도, 그의 부모님도 너무나 미웠다. 낡은 건물이다 보니 방음이 하나도 되질 않았다. 아무리 작은 소리로 속삭여도 우리의 대화는 창문을 타고 여과 없이 밖으로 술술 새어 나갔다. 물론 집 밖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 역시 마치 함께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침실로 들려왔다. 말다툼 한 번 마음 놓고 할 수가 없었다. 항상 숨죽인 채로 밖을 의식하면서 살았다. 편안한 차림으로 문 밖에 나가는 것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옆 집엔 남편의 동료, 윗 집엔 상사가 사는 관사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주말 아침이면 직원들이 모두 마당으로 나와 청소를 했다. 느긋하게 늦잠을 즐기는 평화로운 주말 아침 따윈 언감생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집에서 그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 끔찍한 관사가 결국 나의 신혼집이 된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동거만 하면서 결혼에 대해선 서로 함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공무원에 합격하고 서울을 떠날 때 함께 전라도로 내려온 이상 그와의 결혼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있었다. 그 역시 안정적인 직장을 얻었으니 결혼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미 부부나 마찬가지였지만 법적, 제도적 테두리 안에 포함될 수 있는 부부의 형식을 갖추기로 합의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결혼식'과 '혼인신고' 두 가지였다.
나는 결혼에 대한 환상도 결혼식에 대한 로망도 딱히 없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막상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자 모든 것은 규정된 틀 속에 나를 끼워 맞추는 과정이었고 그와 그의 가족을 받아들이기 위한 양보와 희생의 연속이었다.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전라도가 아닌 서울까지 올라가서 식을 올렸다. 오로지 시부모님의 요구에 따른 결정이었다. 나는 원래도 자기주장이 강한 편은 아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지점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웬만하면 다른 이의 뜻에 맞춰준다. 특히 무언가를 강력하게 요구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체로 그의 뜻을 따라줌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시어머니는 막내아들이 서울에 있는 성당에서 결혼하기를 강력하게 원했고 나는 순순히 그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현실은 예상보다 끔찍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생각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결혼식과 나의 결혼식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머나먼 전라도에서 새벽같이 신부화장을 하고 서울까지 차를 끌고 올라갔다. 오후에 결혼식을 했으니 그 사이 나의 몰골은 하객만도 못하게 엉망이 되었다. 게다가 6월의 이른 더위에 얼굴부터 몸까지 땀범벅이 되었다. 성당의 작고 허름한 신부대기실에는 마땅한 조명조차 없었다. 신부에게만 제공되는 그날의 특별한 화장이나 조명은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대충 단장을 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래도 크게 서운하거나 억울하지는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 또한 추억이고 두고두고 웃으며 회자될 이야깃거리일 뿐이다.
실업급여로 생계를 버티던 백수 출신 동거 커플은 부부가 되어서도 가난이란 꼬리표를 쉽게 떼어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둘은 서로에게 '파랑새'가 되어 주었다. 넓은 집, 좋은 차가 없더라도 함께 있으면 행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는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결혼까지 하면서 새로운 인생 2막을 열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병들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에게서 일어난 미세한 변화를 눈치챘으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모르는 척 외면해 버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평화와 행복이 또다시 산산이 부서진다는 건 상상하기조차 끔찍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