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각 햇빛도 들지 않는 그늘진 땅 위에 화초 하나가 피었습니다. 구르고 구르던 돌멩이 하나가 작은 화초 옆에 잠시 몸을 뉘었지요. 따듯하진 않았지만 화초의 그림자 안은 편안했습니다. 돌멩이는 화초의 그늘을 사랑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돌멩이가 화초 곁으로 가까이 굴러가면 갈수록 화초의 잎은 찢어졌고 땅은 갈라져 버렸습니다. 돌멩이는 답답하고 화가 났지요.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 날에는 더 세차게 구르고 굴러 스스로 부딪히고 깨어졌어요. 깨진 돌멩이는 밤이 되면 화초 곁에 돌아와서 잠이 들었습니다. 들고 나는 돌멩이 곁에서 화초는 날이 갈수록 더 시들어갔어요. 마침내 돌멩이는 깨어지고 깨어져 더 이상 구르지 못하게 되었지요. 가루가 된 돌멩이는 땅속으로 들어가 시든 화초의 뿌리 깊숙이 들어가 박혀 버렸습니다.
사진 무아
아버지는 돌멩이였고 어머니는 화초였다.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는 척박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았고 세상을 돌멩이처럼 험하게 굴러 다녔다. 고명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곱디곱게 자라난 화초였다. 그런 화초와 돌멩이가 만났다. 돌멩이는 여리고 고운 화초를 사랑했지만 화초는 거친 돌멩이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다. 처음부터 둘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함께 있는 동안 화초는 조금씩 시들어갔고 돌멩이는 으스러져갔다. 그렇게 '화초'와 '돌멩이'는 끝까지 어긋나기만 하는 관계였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주 의기소침해지는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
상대방의 마음이라는 건
도대체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같기만 하고,
나는 '저녁' 앞에서 노인처럼
어두운 눈을 비비는 것이다.
출처 시와 산책, 한정원
언제나 '저녁'이었던 두 사람의 마음은 끝내 단 한 번도 서로에게 '낮'이 되어 주지 못한 채 차가웁게 끝이 났다. '나'는 슬프지 않았다. 사랑이 그다지 애처롭지 않아서였다. 내가 사랑의 결실이 아니었어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나'를 타자화하는 데 공을 들였고, 화초와 돌멩이의 깨어지고 뒤틀린 틈 속에서도 나는 '나'를 정성껏 길러내었다.
'화초'는 병약하였으므로 건강한 생명을 잉태할 수 없었다. 화초는 돌멩이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뱃속의 아이에게 무심했을지도 모른다. 여러 생명들이 태어나기 전에 혹은 태어나자마자 그도 아니면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허망하게 사라지곤 했다. 나는 '화초'와 '돌멩이'의 마지막 생명을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잠든 아이의 가슴을 토닥이고 있노라면 내 안에선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솟구쳐 올랐다. 나는 이 아이가 있어서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안도했다. 하지만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십이월의 어느 날, 아이는 눈바람을 타고 홀연 내 곁을 떠나버렸다. 나는 아주 어렸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화초와 돌멩이의 마지막 자식이 한겨울의 차디찬 흙 속으로 사라진 이후, 나는 '홀로 살아남은 자'가 되고 말았다. 외로움은 떼 지지 않는 부적이 되어 다시 내 삶에 들러붙었고 나는 '외동딸'이라는 이름을 평생 짐처럼 이고 살아가는 죄인이 되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나'의 생명은 죽은 형제 자매의 생을 빚진 것이라는 부채감을 오래도록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살았다. 이따금 강한 내가 못내 부끄러워지는 날이면 대답 없는 강물을 향해 돌을 던졌다. 강물에 이는 물결이 한 줄, 두 줄, 세 줄 퍼져 나갈 때 내 가슴에도 함께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들에게 삶을 빚진 만큼 그들도 나에게 죽음을 빚진 건 아니냐며 허공에 소리를 질러댔다. 그럴 때면 그들은 내게 대답했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강한 너는 살아남았다."
오랜 시간 내가 나를 미워하는 시간들을 켜켜이 쌓고 굳히기를 반복했다. 마음의 퇴적층을 들여다보며 살아남아서 혹은 살아 있어서 괴로웠던 순간들을 더듬어 본다. 그들에게 빚진 마음은 사는 내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라는 말 뒤에 그들이 하려던 진짜 말은 무엇일까. 이 말을 책망과 부담의 말로만 받아들인 건 나의 옹졸한 오해였던 것은 아닐까? 나는 오래도록 살아남은 수치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살아남은 의미'에 대한 고민은 하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살아남은 자의 '강함'을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나의 '강함'이 그들의 죽음에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는 걸 안다. 모든 나의 오빠, 언니, 동생을 잃었지만 나는 결단코 무고하다. 내가 이 생에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면 그들의 죽음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 둘 다 아무런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저 높은 곳에 계신 분의 심오한 의도를 한낱 인간은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혈육의 상실이 남긴 삶에 대한 뿌리 깊고 근원적인 상처와 회의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왔다. 현재의 삶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고 삶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에 눈길을 두었다. 하지만 나는 화초와 돌멩이의 뒤틀린 틈 속에서도 홀로 살아남은 강한 자이다.
먼저 간 혈육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살아남은 자여, 그대의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은 삶에 묻어라. 그대의 남은 생에 먼저 간 우리들의 생을 보태어 더욱 더 강하게 살아남아라. 외로움과 고통을 끝까지 견뎌라. 그리고 진짜 죽음이 너를 부르러 갔을 때 우리 곁으로 오라. 그때 너의 빚진 생과 우리의 빚진 죽음이 만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