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외롭고 불우했던 나는 세상에 혼자뿐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하늘처럼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시커먼 가슴일 때가 많았다. 엄마의 인생을 망친 쓸데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죽음을 마음먹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죽기로 작정하는 건 쉬워도 정말로 죽기는 어려운 법이다. 흔들리는 촛불 같이 위태로웠던 나는 꺼질 듯 말 듯하면서도 그 시절을 견뎌냈고 조금씩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인생은 살아보지 않고선 함부로 예단할 수 없다는 것을 반 백이 되어서야 깨닫고 있다. 겉돌기만 하는 기름 같았던 내가 이제는 생의 모든 것들에 물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과거와 그동안 내 곁에 머물렀던 모든 인연들과다정하게손잡기 시작한 것이다.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가슴속에서 화염처럼 솟아오를 때가 있긴 하지만, 예전처럼 나 자신이 이름 모를 땅에 불시착한 방랑자 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여기가 어디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수시로 절망과 두려움에 빠지곤 했던 과거의 나는, 입술이 시퍼런 청춘과 함께 황량한 사막의 어느 한 구석에 조용히 묻혀버렸다.
이제는 '설령' 혼자 남겨질지라도 나만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혼자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죽으려고 했던 내가 이제는 혼자라도 끝까지 살아내겠다고 다짐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 아닐까?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내게 주어진 생을 다하는 것! 그것만이 내가 태어난 이유이자 목적이자 의미임을 받아들이려 한다.
설령, 혼자 남겨질지라도
설령, 지독히 외로울지라도
엄마의 몸을 닦아 주었다. 늙은 엄마의 몸 위로 어린 내 아들의 몸이 겹쳐 보였다. 10살 아이처럼 야위고 작아진 78살의 늙은 여자. 피부는 축 늘어지고 뼈만 앙상하게 툭 불거져 있는 몸. 온몸을 타올로 문질러도 아무런 힘이 들지 않는 작디작은 몸. 생이 소멸해 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시인하고 있는 몸. 그 몸을 보면서 삶의 누추함에 환멸을 느꼈고 생의 유한함에 허무를 느꼈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여자의 몸속으로는 무려 78년이라는 시간이 관통하고 지나갔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 않은가? 바닷물에 깎여 원래의 형태를 잃고 동글동글해지는 자갈처럼 인간도 인생의 풍화를 겪다 보면 그 형태를 잃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 역시 온몸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지나온 생을 목격하고는 눈물지은 적이 있었다. 맨 몸으로 거울을 마주하기가 두렵고 끔찍했었다. 신체의 서글픈 변화가 마음까지 송두리째 흔들어대는 날들도 많았다. 마땅히 흘러가버린 시간은 생각지도 않고, 과거의 어딘가에서 지금 여기로 하루아침에 뚝 떨어져 나온 것처럼 당황스러워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눈앞으로 자꾸만 달려드는 날파리 같은 상념들을 쫓아내면서, 나는 시린 눈으로 엄마의 몸을 닦고 또 닦았다. 아들의 몸을 닦아 줄 때처럼 구석구석 빈틈없이...
외동인 내게 마지막 남은 혈육은 엄마 하나뿐이다. 엄마를 보내고 나면 원가족 중에선 나 혼자만 남게 된다. 어린 시절에 느꼈던 지독한 존재의 고독을 이제는 진짜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약간 두렵기도 하다. 나를 있게 한 존재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이란 얼마나 살풍경할 것인가? 조부모도 부모도 형제자매도 없는 그저 나 혼자뿐인 세상. 하지만 '설령' 혼자 남겨질지라도 나는 완전히 혼자는 아니다. 내 곁엔 남편과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혈육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원가족의 소멸은 보이지 않게 나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티 나지 않게 조용히 외로워할 것이다.
'설령'은 주로 부정적인 가정을 할 때 쓰는 부사이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지만 혹시 일어날까 저어하는 마음을 담아 '설령'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완전히 부정적인 말만은 아니다. '설령' 뒤에는 대체로 앞의 상황과 반대되거나 앞의 상황을 부정하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설령 혼자 남겨질지라도 나는 나만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라는 다짐처럼 맞이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저항과 극복의지를 동시에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
인생의 행불행은 예견할 수 없으니 불길한 가정들이 정말로 현실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들은 두려운 미래를 미리 가정해 봄으로써, 그것에 조금이라도대비해 두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설령 실패할지라도, 설령 헤어질지라도, 설령 틀릴지라도, 설령 아플지라도, 설령 죽을지라도! 수많은 부정적인 경우의 수 앞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해답을 마음속에 조용히 적어놓는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이 눈앞에 펼쳐질지라도그 속에매몰되거나 주저앉지 않을 힘을 축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