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를 좋아한다. 이때의 '걷기'란 뚜렷한 목적지나 방향 없이 그냥 걷거나, 다른 교통수단이 있는데도 굳이 걷기를 선택하거나, 그야말로 걷기 자체가 목적인 경우를 모두 다 포함한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감히 '걷는 사람'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는 없다. 나의 걷기는 간헐적이고 불규칙적이며 제멋대로이기 때문이다. '걷는 사람'의 정의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걷는 사람'이라고 불리기엔 한참 부족하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하정우란 배우는 자신을 '걷는 사람'이라고 당당히 소개한다. 그가 쓴 책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으며정말이지여러 번 입이 쩍 하고 벌어지는 순간들이있었다. 그는 일상의 대부분을 걷기에 할애하고 걷기를 삶의 중심에 둔 사람으로서 하루라도 걷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친다고 할 법한 사람이었기때문이다. 해외여행도 오로지 걷기 위해 가는 사람, 대부분의 장소를 걸어서 이동하는 사람, 걷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걷는 사람, 그냥 모든 게 다 '걷기'로 귀결되는 삶을 사는 사람. 그게 바로 걷는 사람, 하정우였다.그러니 근력도 체력도 부족하고 몸을 쓰는 데 게으르기까지 한 나는 진짜 '걷는 사람'이 되지는 못할듯하다. 다만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턱밑까지 막히는 날이면 '일단'걸어보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나는 '걷는 사람'은 아니어도 '걷기를 조금 아는 사람'정도는될 수 있겠다.
걷기 전과 후에세상이나인생이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마음속주름이미묘하게 펴져 있거나 밀물과 썰물의 방향이 바뀌듯 마음의 결이 뒤집어져 있었던 적은 많았다. 만 보니 오천 보니 하는 걸음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몇 미터니 몇 킬로미터니 하는 거리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리를 움직여 몸뚱이를 끌고 집밖으로 나가보는 것그리하여 익숙한 길이든 낯선 길이든잠시라도 걸어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사방으로 내달려 먼지처럼흩어지는영혼을잠시내 안에붙들어두는 데 도움이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뜬구름처럼부유하는 날이면 속으로 조용히 주문을 왼다.
일단, 걸어보는 거야.
돌이켜 보면 나의 '걷기'는 주로 인생의 방황기나 과도기와관련이있었다. 당시엔 의식하지 못했으나 마음이 고통스럽거나 힘겨울 때면 몸이 저절로반응했던 것 같다. 지금에야 '걷기'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엄청난 효능과 장점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옛날엔그런 상관관계를아는 사람은별로 없었다. 즉, 걷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유독 마음을가누기 힘든 날이면 나는 보약을 먹듯,링거를 맞듯'일단'걸었다. 그러면 마법처럼걱정은단순해졌고 마음은한결가벼워졌다.
수도자의 삶으로 들어서는 결심을 할 때에도 끝내엎어져생의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쳤을 때에도 나는걸었다. 사는 곳주변이든 낯선 곳이든 가리지 않고 걸었다. 몸뚱이만 가지고 무작정 상경했을 때에도패잔병이 되어 서울을 등지고 떠나올 때에도 나는 걷다가울고 웃었다. 운명이 마치 길 위에 깔린 보도블록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발 한 발 온 힘을 다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걷다보면 내가 해야 할 일들이조금은선명해지는 것도 같았다.걷고 싶은 마음이 비 내린 뒤 마른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들처럼 삐죽삐죽 올라온다는 건, 인생에서 아주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임을 알려주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걷기는대체로 내게답을 주었다.
그렇다고 평소에 노상 걷기만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 만보 걷기를 실천하고 있지도 않으며 날이 춥거나 더우면 온종일 집밖으로 나가지 않기도 한다. 나는 걷기에 대하여 실로 아무런 계획이나 다짐도 없는 사람이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것뿐이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은 꼭 찾아오곤 했었다. '일단'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태산처럼 커져버리는 순간이. '일단'이란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먼저, 우선'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부사이다. 그렇다. 내게는 '일단 걷는다'라는 표현이 무척이나 절실하게 와닿는다. 인생에서 걷기가 꼭 필요한 순간에는아무런 생각 없이 '일단 걸어보는 것.' 그것이 내가 삶의 고통을 견디거나 위기를 건너온 비결 중 하나였던건 틀림없었다.
나를 아는 모두와 연락을 끊은 채낯선 곳에서 혼자 하루하루를 연명하듯 버티던 때였다. 나는 유배생활을 하는 죄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던 밤, 죽음이내 옆에 아주 가까이 다가와있음을선연히느꼈다. 하지만 죽음이 주는 실재적인 고통은 생각보다 너무 크고 끔찍해서 감히 시도조차 하기가어려웠다. 나의 영혼이 나의 주검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는 듯한 환상 속에서뜬눈으로 밤을지새웠다. 어김없이 날은밝았고 나는 따가운 햇빛에 몸서리치면서 살아 있음의무게를또다시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날,일어나자마자나는 나에게 아침밥을 차려줬다. 빵이나 라면으로 끼니만 간신히 때우던 내게 따뜻한 밥을 짓고 국을 끓여주었다. 그리고는 무작정 밖으로 나가 아무 버스에나 올라탔다. 도대체 어디까지 얼마나 갔을까? 나는 또 아무런 목적도 없이 내렸고 방향도 없이 걸었다. 그 길의 끝자락에서 아주 작은 절 하나를 발견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작고 허름한 곳이었다. 나는 주변을 배회하면서 길목을 에워싸고 있는 들꽃들을 보거나 만졌고, 텁텁하고 무덥던 초여름의 공기를 느꼈고, 가만가만 내딛는 느린 발걸음을 응시했을뿐이었다. 그렇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그 공간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나는 다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원룸으로 되돌아왔었다. 한없이 시시하고 아무것도 아닌 외출, 그게 다였다. 하지만 그날, 지옥 같이 캄캄한 밤과 백지처럼 텅 빈 낮을 보낸 이후로 나는 다시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걷다 보니 뜻하지 않은 곳에 도달했듯이,아무렇게나 살다 보면어디에든 도달할지모른다는 생각이 난생처음들었던 걸지도...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든지 꼭 권해 주고 싶다. 어둠이 눈앞을 가려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고 두렵기만 한 날에는 '일단' 걸어보라고. 익숙한 곳이든 낯선 곳이든 상관하지 말고, 십 분이든 한 시간이든 따지지 말고 그냥 몸을 일으켜 자신에게 가장 작고 쉬운 한 걸음만 '일단' 떼어보라고. 그날 걷다가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느낀 그 무언가가, 그토록 사소하고도 시시한 무언가가 당신을 다시 살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