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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Jun 13. 2024

함께, 라는 꿈과 허상

내가 원하는 '함께'는 무엇일까?

함께

- 한꺼번에 같이. 또는 서로 더불어.


 "부사가 생각나지 않네."

 "엄마, '함께' 어때?"

 "함께? 그거 좋은데? 왜 아직까지 그걸 안 썼을까? 근데 '함께'를 고른 거?"

 "엄마랑 '함께' 있는 게 너무 좋아서."


 아들이 학교에서 MBTI 검사를 받아왔다. 정식검사는 아니어서 신뢰도가 높진 않지만 처음으로 아들의 기질을 객관적인 데이터로 접할 수 있었다. 아들의 검사 결과는 ENFJ라고 했다. 의외의 결과에 짐짓 놀랐다. INFJ인 나와 하나만 다르고 똑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9년 동안 아들을 키우면서 나와는 참 많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아들은 나와 꽤나 비슷한 성향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자기와 비슷한 보단 다른 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러니 성향이 많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면 외계인만큼이나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들은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도 어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친구를 못 사귄다거나 단체 생활이 힘들다는 어려움을 호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반면 나는 어떠했는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것도 힘들었고 선생님이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는 건 끔찍한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늘 조용히 한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고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어주어야만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나에게 '함께'라는 부사는 갑갑하고 부담스러운 굴레이자 나의 예민함을 찔러대는 날카로운 바늘이었다.


 '함께' 라는 꿈과 허상

 내가 원하는 '함께'는 무엇일까?




 인간은 변하고 성장한다. 도무지 사회적 인간이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나도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다듬어지고 길들여져 갔다. 학교는 정말이지 내게 절대적으로 고마운 공간이다. 부단한 반복 학습을 통해 나는 어느덧 사람들과 잘 어울릴 줄도 알고 필요한 때에는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설 수도 있는 정상적인 사회인이 될 수 있었다. 교사가 된 이후엔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노래나 춤을 추는 경지에까지 오르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나의 내향적 성향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뭐든 시키면 했고 해야 하니까 했을 뿐이지 자연스럽게 되는 건 아니었다. 억지로 노력해서 해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삶은 고단하게만 느껴졌다.


 7년 여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나왔을 때 생각보다 홀가분했던 것은 나의 성향에 위배되는 일들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나는 다시는 다수의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 편집자도 상담사도 공무원도 근무 여건은 늘 비슷비슷했다. 대체로 조용한 공간에서 소수의 사람과 교류하면서 혼자만의 업무에 집중하면 되었다. 지금의 글쓰기 역시 그런 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나란 존재의 타고난 색깔을 지우거나 다르게 덧입혀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을 수 있어서 참으로 편안하고 좋다.


 그렇다고 '함께'를 무턱대고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할 것이다. 강요되는 '함께'에 경기를 일으키는 것일 뿐, 때로는 '함께'이길 누구보다 강렬히 원하고 '함께'일 때 지극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내향적인 나는 조용한 곳에서 정적인 휴식을 즐기는 반면, 외향적인 아들은 복잡한 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동적으로 노는 것을 즐긴다. 나는 그런 아들과 '함께' 하기 위해 기꺼이 번잡한 공간으로 동행을 한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이기에 나와 맞지 않는 공간에 있을지라도 그다지 고통스럽다고 느끼지 않는다. 어떨 땐 진심으로 행복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내면에는 '함께'의 다양얼굴들 마구 혼재해 있는 게 아닐까? 사람마다 '함께'하고 싶은 대상의 외연이 다르고 '함께' 하고 싶은 일의 종류도 제각기 다른 것이다. 내 선에선 굳이 '함께'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들을 누군가는 반드시 '함께' 해야만 한다말할 수도 있다. 가까운 가족이나 연인, 친구끼리도 그러하다. 과연 어디까지 '함께'여야만 하는 것일까? 정해진 기준 같은 건 없다. 결국 '함께'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 느끼는 행복 여하달려있을 것이다. 힘겹고 고통스럽다고 느껴지지 않는 수준! 거기까지가 억지 아닌 진심으로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마지노선인 것이다.


 예전엔 꿈도 꾸지 못할 일이 가족과의 '절연'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깃발 앞에선 이유불문하고 모두 '함께' 한 방향으뒤따라 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패륜이라 하여 범죄자와 비슷한 비난을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부모 자식 간에도 형제자매 간에도 고부간에도 인연을 끊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만큼 '함께'의 기준이 사회나 타인이 세워 놓은 강제적인 벽이 아닌, 개인의 판단에 의한 유동적 울타리 정도가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각자의 기준에 대해 그 누구도 함부로 비난할 자격은 없다. 오죽 '함께'하기 고통스러웠으면 가족과 '함께' 하기를 포기했는가?


 나란 사람은 I 성향으로 치우쳐 있으면서 '함께'의 기준 역시 다른 사람들에 비해 협소한 편이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함께'의 미덕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 폭력이나 강요가 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함께'는 아니기 때문이다. 살면서 '함께'라는 꿈이 한낱 허상에 지나지 않았음깨닫고 허무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와 상대의 '함께'가 하나로 어우러지고 아름답게 공명할 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관계의 행복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이 나에게 외치는 '함께'는 언제나 진심이었고 나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이따금 상대의 진심에 의문이 드는 '함께'도 분명 있었다. 그럼에도 가식의 가면을 쓰고 '함께' 해야 할 때는 꾹 참고 함께하기도 했다. 온전히 '함께'일 수 없더라도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인생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된 '함께'를 과감히 걷어차버리는 용기 역시 삶에서 꼭 필요한  아닐까? 누군가와 무엇을 '함께' 할지 고민하는 일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


 함께, 라는 꿈과 허상

 내가 원하는 '함께'는 무엇일까?

 그대와의 '함께'가 진심이고 우리가 '함께' 행복할 수 있기를..


출처   찰리 맥커시,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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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가족과의 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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