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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Jun 20. 2024

반드시, 라는 믿음에 구멍이 났어요.

소소한 일상을 향한 작은 소망, 거기서부터 삶은 지속된다.

반드시

 - 틀림없이 꼭.


 어른이 되면서 실망스러웠던 일을 꼽는다면 무엇이 있을까?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을 허탈하게 했던 건 '인과응보'의 배신이었다. 어린 시절에 읽은 세계 명작 동화나 전래 동화는 하나같이 비슷했다.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았고, 착한 일을 하거나 바르게 산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았다. 물론 그런 인과응보의 법칙에 어긋나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성냥팔이 소녀나 플란더즈의 개에서는 착하고 가련한 주인공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왜 착하디 착한 주인공을 이렇게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냐며 작가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그런 우울한 이야기들이 세상의 전부는 아닐 거라며 외면했었다. '인과응보'로 귀결되는 뻔하고 단순한 이야기들이 내가 살아갈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깨달았다. '인과응보'란 현실을 움직이는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순한 어른으로 길들이기 위한 신기루 같은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비참한 현실을 깨닫 전에 잠시 달콤한 사탕을 입에 물려주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사탕이 다 녹아 없어져버린 혀로 맛본 세상은 생각보다 쓰고 떫기만 했다. 어디에도 나를 위로하거나 달래줄 아름다운 '인과응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늘 착하고 부지런하게 살려고 노력해 왔다. '인과응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마음 한편에선 그런 삶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은 채로 말이다. 나는 이미 '반드시'라는 신화에 길들여져 버렸으니까.


 반드시, 라는 믿음에 구멍이 났어요.

 그럼 도대체 삶의 희망은 어디에서 찾나요?

 



 가난한 사람은 평생 가난으로 고통받고 병든 사람은 죽을 때까지 병마와 싸워야 하는 게 인생이다. 착하고 바르게 열심히 것과 그 사람의 운명 그다지 상관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사실 모두가 다 알고 있으면서 쉬쉬 입막음하고 있을 뿐이다. 실낱같은 희망이 존재할 거라고 애써 자위하고 젠가는 자신이  대단한 기적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꿈을 꾸면서 말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은 몰라도 적어도 내 인생만을 두고 보았을  '인과응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시험에 합격하거나 취업에 성공했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 '반드시' 통장 잔고가 늘어났다. 그 성과가 미미할 뿐이지 분명히 '인과응보'였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껏 내가 그 달달함에 빠져 개미처럼  부지런히 살아왔던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 보자면 지독하리만큼 '인과응보' 따위는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개인의 인생사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 거라고 믿는다. 우리의 삶에 진짜로 '반드시'가 존재했던가? 내가 간절히 원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졌던가? 물론 나의 노력이 부족했고 나의 잘못이나 실수 때문에 결과도 좋지 않았던 거라고 탓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래도 모든 불행과 실패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있단 말인가?


 내게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던 불행의 덫은 남편의 우울증이었다. 이제는 십수 년이 되었으니, '반드시' 낫는다는 말은 함부로 입에 담을 수조차 없다. 그럼에도 주변에서는 종종 그런 말들을 쉽게 해주곤 한다. 남편의 어머니조차도 여전히 '반드시' 나을 거라고 믿는 듯 이야기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체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비관적이거나 삐딱해서가 아니라 쓰고 떫은 현실을 너무 많이 맛보아서 그런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알기에 그렇다. 그러니 '반드시'라는 부사는 나 자신이 절대로 가슴에 품어선 안될 금기어이기도 하다.


 이렇게 '반드시'라는 마음에 구멍이 나 버린 사람은 인생을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남편도 나도 소리 없이 절망하지만 겉으로 티 내진 않는다. 우리는 각자 치열하게 살아갈 이유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반드시'에 난 구멍으로 찬바람이 휙휙 불어닥칠 때마다 시린 가슴을 쓸어 덮기 위해 온갖 희망의 부스러기들을 가져다 그 구멍을 메꾸려 노력한다. '인과응보'가 있기를 바라는 것도 '반드시'가 응답을 해 주기를 바라 것도 아니다.  그저 나에겐 구멍을 덧댈 아주 작은 희망의 조각 하나가 필요할 뿐이다.


 추위에 얼어 죽던 밤, 네로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난은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고 착한 마음으로 한 행동은 오해와 비난을 받았으며 아무리 최선을 다해 노력했어도 꿈꾸던 화가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놓지 못했던 건 평범한 일상에 대한 작은 소망이지 않았을까? 거창한 성공이나 벅찬 행복, 통쾌한 인과응보가 아니라 아주 작은 일상의 따스함에 대해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을 것이다. 실로 나라면 그러할 것이다. 성냥팔이 소녀가 끝내 가슴에 품고 스러진 이 가족과의 단란한 크리스마스 만찬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알면서도 여전히 '반드시'의 작은 꼬투리를 움켜쥐고 놓지 못한다. 네로가 되기보단 미운 오리 새끼가 되기를, 성냥팔이 소녀가 되기보단 신데렐라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어린 날처럼 '반드시'에 대한 순진한 믿음은 없지만, 언젠가 이루어질지도 모를 작은 소망 하나쯤은 품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남편이 고통스럽지 않게 눈을 뜨고 억지로 견디지 않아도 사람 속에서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되기. 그런 날들이 더이상 성냥을 그어야만 보이는 꿈같은 환영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삶에서 시시하게 발부리에 차여 굴러다니는 흔한 일상기를.  작지만 이루기엔 크고 멀기만 했던 소망 하나를 나는 주머니 속에서 꼭 쥐어본다.


 반드시,라는 믿음에 구멍이 났어요.

 그럼 도대체 삶의 희망은 어디에서 찾나요?

 삶이 구원받길 바라지는 않더라도

 소소한 일상을 향한 작은 소망, 거기서부터 삶은 지속된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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