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는 뱀으로 된 머리카락을 지닌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누구든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기만 해도 온몸이 돌로 변해 버리는 끔찍한 저주를 받게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사람들은 그 얼굴을 '자꾸'쳐다보고 만다.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안 볼 수가 없어서이다. 메두사의 얼굴은 잊고 싶은데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괴로운과거를 연상시킨다. 안 보면 좋을 것을 왜'자꾸' 과거를 뒤돌아보고선돌덩이가 되어꼼짝도 못 하는 것일까?
'자꾸'라는 부사를 떠올리면, 어디선가 슬프고 우울한 블루스가 들려오는 듯하다. 후회와 미련의 블루스가 배경음악으로흐르면 나는 어느새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버린다. 어두운 과거를떠올리면서 명랑만화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애통하거나 원통한 일들이 비극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동안, 나는 여주인공에 걸맞은 연기를 하면서 홀로 한숨짓거나 눈물을 흘린다. 한편으론 이런 궁상맞은 짓거리는이제 그만 때려치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과거의덫에 빠져버린 나는 '자꾸만'고통의 물레를돌리는 것이다.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비극이 상연되고, 마침내 밤은 하얗게 나를 질식시켜버린다.
자꾸,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은
메두사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출처 Pixabay
그런데 모두가 메두사를 보고 돌이 된 것은 아니었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얼굴을 보고도 그녀의 목을 베어버리지 않았던가? 그가 그녀를 물리칠 수 있었던 건그녀의 얼굴을 직면하지 않고 방패에 비친 반영을 보며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과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귀한 힌트 하나를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객관화라는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이다. 끔찍하거나 비통하거나 어리석었던 과거를 있는 그대로 '자꾸' 뒤돌아보는 건 메두사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만약 페르세우스처럼 과거를방패에 비친반영으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덜 상처받으면서 그것을 극복할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비겁하다고 욕할지도 모르겠다. 맨눈으로 보지 않고 반사된 모습을 보는 것은 진실을 왜곡하여 제멋대로 해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를 조금 미화하거나 합리화한다고 해서 죄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꾸만' 내 발목을 붙들고 '자꾸만' 내 삶을 주저앉히는 어두운 과거라면 편법을 써서라도 물리쳐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의 인생이니까 말이다.
사실 '자꾸'라는 부사에는 아무런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 끊임없이 반복해서 마음이 가고 행동을 하게 되는 상태 그 자체를 뜻할뿐이다. 우리에겐 유쾌한 '자꾸'도 상당히 많다. 사랑에 빠진 이는 '자꾸' 한 사람만 생각할 것이고, 재미있었던 일들은 자다가도 '자꾸' 웃음이 날 것이며,시험에 합격한 이는 '자꾸' 자기 볼을 꼬집어 보게 될 것이다. 너무 즐겁고 행복해도 '자꾸'의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행복한 일보다 불행한 일에 더 오래 집착하고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특히 지나간 과거에 대한 상념들은 완전히 벗어나기 힘든 굴레이자 쳐다보지 않을 수 없는 메두사의 얼굴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페르세우스의 방패를 얻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암흑 같은 과거의 목을 베어버리도록 도와줄 방패! 누구나 자기만의 방패가 있겠지만 나는 글쓰기를 통해 과거를 들여다보면서 '자기 객관화'가 더 수월해질 수 있었다.
누군가는 걷거나 달리고, 누군가는 명상을 하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며, 누군가는 피아노를 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때 나는 초상화를 배우고 수도원에 들어가고 연극 동호회에 나갔다. 천연염색을 배우고 커피를 배우고 집단상담도 하러 다녔다. 젊은 시절엔 무언가를 계속해서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와 생각건대 소소한 취미에 지나지 않는 것이든 진로를 통째로바꾸어버리는것이든과거를 객관화하기 위한 나만의 처절한 노력이 아니었던가 싶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에는 읽고 싶은책과 쓰고 싶은 글이있다. 돌잡이로 연필을 들었다던 나는 긴 세월을 돌고 돌아 다시 펜을 잡아든 것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자꾸' 쓰고 싶었고 쓰다 보니 '자꾸' 나의 인생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달라져가는 나를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글이라는 방패를 통해 들여다본 과거 속에서 마침내 발견하게 된 것은무엇이었는가? 그것은보이지 않게 깊숙이 박혀 있던 '나만의 슬픔'이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을 품고 살아간다. 슬픔은 없애버려야 할 것이 아니다. 상처는 낫고 슬픔은 머문다. 우리는 우리에게 머물기로 한 슬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슬픔은 삶을 신중하게 한다. 그것이 슬픔의 미덕이다.
- 유진목, 슬픔을 아는 사람
어두웠던 과거를 '자꾸' 뒤돌아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결국엔 그 안에서 자기만의 슬픔을 발견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인생이 우리에게 내어준 가장 어려운숙제가 아닐까?그리고 그 슬픔을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그것이야말로 페르세우스의 방패가 지닌 진정한 능력일 것이다. 과거를 객관화하여 들여다보고고통과 상처로 흉측하게 변해버린 메두사의 목을 과감히 베어버리자. 그리하여 내 안에 슬픔만을 오롯이 남겨 놓을 수 있게되었을 때, 그슬픔은내삶의 진짜힘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