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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Jul 11. 2024

거의, 닿을 듯하지만 여전히 닿지 못한...

희망 고문은 그만! 나는 지금 여기에서 오늘을 살고 싶다.

거의

 - 어느 한도에 매우 가까운 정도로.


 "거의 다 되었어."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거의'란 동시에 두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부사이다. 끝이나 완성에 도달해 간다는 안도와 기쁨, 다 되었지만 아직은 조금 더 남아 있다는 답답함과 갈급함. 그 두 갈래 사이에서 나는 혼란스럽다. 그래서 '거의'란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다가도 이내 나빠져버린다. 닿을 듯 가까워졌지만 아직은 닿지 못했기에 여전히 머나먼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감질나게 사람을 희망 고문하는 '거의'. 나는 이 부사 앞에서 백 퍼센트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의 희망과 비극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로 한다.


 완벽과 완벽에 가까운 '거의' 사이엔 얼마만큼의 간극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주 근소한 차이일 수도 있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평행선처럼 영겁의 거리일 수도 있다. 마지막 한 걸음, 한 숨, 하룻밤을 두고도 모든 걸 포기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누군들 알았겠는가. 고지가 바로 코앞에 있는 줄을. 우리는 오늘도 숱한 희망 고문을 하면서 살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경우도 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막막한 미래를 향해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걸어갈 수있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어떻게 '거의' 다 온 걸 알고 마지막 한 방울의 땀까지 쥐어짜 낼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거의'가 주는 희망에 연연하싶지 않다. 내일의 영광을 위해 오늘의 한 숨을 마지못해 참으며 고통 속에 몸부림치싶지도 다. '거의'는 말 그대로 '거의'일 뿐이니까. 오늘도 내일도 어쩌면 먼 훗날에도 여전히 '거의'에만 머물러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거의, 닿을 듯하지만

 여전히 닿지 못한 세계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싶지는 않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만난 시인 이육사와 한용운은 평생토록 나라의 독립을 간절히 염원했으나 광복 직전 해인 1944년에 돌아가셨다. 그야말로 광복이 '거의' 코 앞에 다가왔는데 직접 목격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눈을 감은 것이다. 더 통탄할 사람은 윤동주 시인이다. 그는 독립을 불과 며칠 남겨두고서 옥중에서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독립 의지를 죽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막막한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이 되어 타버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분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거의'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은 나라의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그 꿈이 '거의' 실현되고 있다는 걸 알았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못했같다. 오히려 미래가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독립을 향한 의지를 날마다 새로이 다지고 또 다졌을 것이다. '거의'라는 희망 따위에 매달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모든 걸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내어 던진 것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나라면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해도 막막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인생을 투신하는 쉽지는 것 같다. 특히 '거의'라는 희망조차 없다면 현실  끔찍한 지옥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들의 마음을 함부로 예단할 수는 없지만, 감히 상상해 보건대 그들은 결코 스스로에게 희망 고문을 하면서 억지로 하루하루를 버티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무리 깊은 우물이라도 쉬지 않고 퍼내기만 하면 언젠가는 바닥이 드러나는 법이다. 열정이나 의지는 뽑아내고 또 뽑아내도 무한대로 솟아나는 '화수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꿈의 실현 가능성 자체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꿈이나 목표에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그저 백이 되는 순간까지 언제나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변함없이 매일살아나갔을 뿐이다. 희망에도 절망에도 휘둘림 없이 어쩌면 참으로 담담하게.


 소위 명문대학에 들어간 사람들은 어린아이일 때부터 목표를 세우고 비장한 자세로 학업이라는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목표 도달한 것일까? 물론 목표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공부로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매일 똑같이 자기가 해오던 공부를 반복했뿐이다. 오히려 그들을 움직였던 가장 큰 힘은 '거의'라는 희망 고문이나 결승점 앞의 카운트다운이 아니라, 오늘 해야 할 노력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 없는 작은 습관 속 있었다. 그렇게 몸에 밴 복적인 일상이 쌓이고 쌓여 결국 명문대학 입학이라는 결과에 도달한 다.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향해 피땀 흘려 노력하는 행위를 폄하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그런 비장함도 성공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나는 그게 다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명언처럼 희망이나 절망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오늘을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거의'가 주는 희망이나 비극은 현재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싶다. 꿈은 있지만 꿈을 향해 나아가는 하루하루의 성과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으면서! '거의'라는 말이 누군가에겐 격려고 누군가에겐 채찍질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에 목을 매는 순간 나는 늘 닿지 않는 세계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실패자가 되어버릴 테니까. 나는 지금 여기에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오늘을 성실히 살아가고 싶다. 꿈이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 모르는 가운데에서도 자신이 하기로 한 일을, 혹은 해야만 하는 일을 묵묵히 해나갔던 역사  그분들처럼...


 거의, 닿을 듯하지만 여전히 닿지 못한...

 희망 고문은 그만!

 나는 지금 여기에서 오늘을 살고 싶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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