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이 쓰이는 상황이나 맥락, 그리고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심리적 태도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므로, 단적으로 수량화하여 나타내기는 어렵습니다.
나의 '잠시'와 너의 '잠시'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당연한 말이다. 좋은 일엔 '잠시'가 아쉽고 빠르기만 한 시간일 테고, 나쁜 일엔 '잠시'가 견디기 힘든 기나긴 시간일 테니까. 그래서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 일에 대해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라는 말로 강조하고, 생각보다 긴 시간에 대해서는 '한동안'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니 '잠시'란 아주 짧지도 길지도 않은 애매한 시간을 뜻하는 부사인 것이다.
잠시, 기다려.
너와 나의 '잠시'는얼마나 다를까?
돌이켜보건대 '잠시'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 건 아들한테였다. "잠시 기다려. 엄마가 이것만 하고 갈게!" 아이가 열 살이 되도록 나는자주아이를 기다리게했다. 워킹맘일 때는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쌓여 있었고휴직맘인 지금도 아픈 엄마 병간호와 집안 살림으로시간이모자라긴마찬가지이다.그래서 나는'잠시'라는 눈깔사탕을 입에 물려주고는 단물이 다 녹아 없어져 쓴 물이 날 때까지아들을기다리게만 하는 '양치기 엄마'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아들도 눈치챈 듯하다. 엄마가 말하는 '잠시'와 자기가 생각하는 '잠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잠시'라는 말로 슬쩍 덮고유보하면서 살아왔을까?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누적되면 하루가 되고 한 달이 되고 결국엔 인생이 된다. 천상병 님은 '귀천'이란 시에서 인생을 아름다운 소풍에 비유했다. 지나고 보니오십 년 가까운 내 삶도 '잠시' 마실 나온 것처럼 순식간이었다. 이렇게 짧은생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잠시'에모든 걸 제쳐놓고 달려가지 못한 건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래도 휴직을 하면서 '잠시'라는 말을 예전보다는덜하게 되었다. 엄마만을 바라보는 아들에게도, 딸만을 바라보는 엄마에게도, 아내만을 바라보는 남편에게도! 시간은 돈만큼이나 한정적이다. 내게 주어진 24시간은 어떻게 사용하는지와 무관하게 모래알처럼스르륵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고만다. 흘러간 시간에 대해 늘 망연자실해하면서도 나는 중요한 일보다는 해야 할 일에, 가치 있는 일보다는 급한 일에더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아는가? 누군가에게는'잠시'인 줄 알았던 이별이나유보가 영원이 되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이적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란 노래이다. 무심히 흘려 들었을 땐 사랑하는 연인에게 버림받은 이의 슬픔을 담은 노래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의 애처로운 독백이 들려온다. 잠시 뒤에 돌아올 거란 말을 남기고 떠나 버린 엄마. 그런 엄마를 온몸이 얼어붙을 때까지하염없이 한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 하지만 엄마의 '잠시'는 돌이킬 수 없는 거짓말이 되어버리고 버려진 아이는 죽을 때까지 엄마를 그리워하다가 끝내는 미워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가엾은아이를 만나고부터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어린 날, 나의 엄마도 하루아침에 사라졌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렸었다. 말없이 떠난 엄마는 돌아올 때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마치 그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니 엄마가 내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물리적인 시간의 길이도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도 엄마 자신은 그때가 인생의 아주 '잠시'일 뿐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가슴엔 나락 같이 깊은 골짜기가 파였다. 나는 엄마의 '잠시'에 숨이 멎었고 차갑게 얼어붙어 버렸었다. 엄마를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 증오하게 되었고 돌아온 엄마가 미치도록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끔찍하기도 했다. 엄마의 '잠시'는 결단코 내겐 영원이었다.
그랬던내가 '잠시'를짧고 대수롭지 않은 시간이라고 여겼던것이다. 비단 아들에게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모두에게 나는 오랫동안 거짓말쟁이였을지도모르겠다. 내가 돌아봐주기를 혹은 돌아와 주기를 한결같이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에게 나의 '잠시'는 캄캄한 영원이었건만그걸모르는 척 해온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나는"잠시"라고 말하는 게두려워졌다.
오늘도 아들은 눈을 뜨자마자 다급히 나를 부른다. 남편은 우울한 눈빛으로 나를 좇는다. 아픈 엄마는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는다. 지친 나는 고함이라도 지르고싶어 진다. "잠시만 기다려." 하지만 나는 터져 나오려는 성급한 말들을 손으로틀어막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가는 '잠시'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짧고 소중한 '잠시'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