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하우스에서 훔쳐본 그림일기

싱글맘의 육아일기-20

by malee

미국은 부활절 기간에 맞추어 봄방학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일주일 정도의 봄방학을 갖는다. 미국 학교들은 봄방학을 하기 전, 오픈 하우스라 하여 아이들이 그동안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학업 결과라 할 페이퍼 워크를 나름대로 예쁘게 꾸며 부모들과 친척들을 초청하는 것이다.


나는 오픈 하우스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날도 야근을 하기 위해 오늘 저녁에는 뭘 먹지 후배들과 설왕설래하던 도중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수진이 학교 오픈 하우스인 거 알지?” “그게 뭐야?” “ 너, 엄마 맞아?” “언니가 대신 가면 안될까?” “우리 애들은 어떻게 하고? 다른 애들은 다 엄마와 아빠가 함께 갈 텐데, 엄마 혼자라도 가야 할 것 아냐” “너무 바빠서 갈 수 없을 것 같아”


주말 창간을 목표로 내가 진행하고 있던 주간지 작업이 한창이라 도저히 일찍 퇴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몇 마디 잔소리를 하던 언니도 “너 알아서 해라. 니 딸이니까. 정 안되면 할머니하고 같이 가라고 해야지”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수진이 하나 잘 키워보겠다고 이곳까지 와서는 애를 이 지경으로 방치하고 있다니… 아무리 먹고사는 게 중요하다지만 애 학교 행사 하나 기억도 못하고… 엄마로서 내가 자격이나 있는 건지 한심하기만 했다. 부랴부랴 하던 일을 집어던지고 매일 저녁에 하는 편집회의까지 급한 상황이 있다며 빠지고는 집으로 향했다.


목이 빠지게 외삼촌의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수진이는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빨리 가자”며 서둘렀다. 전혀 엄마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듯했다. 수진이와 함께 도착한 학교는 손에 손을 잡고 가족과 일가친척이 모두 모여 아들, 딸, 그리고 손자 손녀들의 학교생활을 보려는 부모들과 할아버지 할머니들로 붐볐다.

수진이의 학교 생활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던 오픈 하우스행사. 미국 학교에서는 부모를 초청해 함께 하는 행사가 유난히 많다. 이 행사에 꼭 참가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수진이 담임과 간단한 인사와 안부를 묻고는 수진이가 그동안 공부했던 페이퍼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수진이 담임선생님은 수진이가 그림을 잘 그린다며 늘 수진이 그림을 샘플로 아이들에게 보여준다고 칭찬을 했다. 그림 그린 것을 모아놓은 화집을 보다가 나는 종이 넘기기를 멈춰야 했다.


우리 가족이라는 타이틀로 그려진 그림에는 수진이와 나, 그리고 외삼촌 외사촌 동생과 외사촌 오빠, 이렇게 외갓집 식구들만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수진이가 그린 가족 그림은 늘 이런 식이었다. 워낙 어렸을 적에 헤어진 관계로 일 년에 두세 번은 친할아버지 댁에 간다고 해도 그다지 별 따뜻한 정을 느끼지 못했는지 친가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다.


집안에 손녀라고는 수진이 하나뿐인데도 엄마, 아빠가 이혼한 때문인지 아니면 이것도 내 욕심이 너무 큰 때문인지 수진이는 첫 손주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이제 무슨 소용이겠는가? 다 지난 일인데…


가끔 수진이도 친할아버지 댁을 기억해내곤 한다. 한 번은 미국에 와서는 “엄마, 노할머니(애아빠의 할머니)가 살아 계실까? 춘천에 가면 노할머니하고 호수에서 산책도 하고 공놀이도 하고 그랬는데…”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노할머니는 엄마와 아빠 사이가 좋지 않은 수진이가 불쌍하다며 많이 예뻐하셨다. 미국에 온 뒤로는 잊고 있다가 노할머니가 사주었던 목걸이나 팔찌 등을 보면 아마도 노할머니가 불현듯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나를 참 예뻐하셨다. 애아빠 혼도 많이 내고 어떻게 해서든 마음을 돌려보게 하려고 노력하셨는데 …


수진이가 그리는 가족 그림에 엄마와 자기, 혹은 외갓집 식구들만 등장하는 것 말고 아빠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모두 골고루 등장하게 그렇게 해주고 싶다. 예전에는 아주 평범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일이 또 있나 싶다.


오픈하우스에서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공부를 하나 살짝 보았다. 그러던 중 조엘이라는 한 남자아이의 그림일기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나는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아빠를 기다린다.’고 꼬불거리는 글씨로 적혀 있었다.


왜 이렇게 세상은 사는 게 쉽지 않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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