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프렌드 잭클린(?)

싱글맘의 육아일기-21

by malee

오픈 하우스가 있던 날, 수진이 클래스의 부모들이 모두 모였다. 검은 머리, 노란 머리, 빨간 머리에 베트남인 중국인, 아르마니아인까지 그야말로 클래스의 부모들은 다인종의 전시장 같았다.


수진이와 교실을 돌아보던 중, 수진이가 ‘Hi,Jaclyn’하며 잭클린이라는 친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잭클린은 아빠에게 열심히 자신이 수업시간에 만들었던 과제물에 관해 설명을 하는 중이었다. 잭클린의 아빠는 수진이가 잭클린의 가장 친한 베스트 프렌드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잭클린의 부모는 수진이에게 집으로 놀러오라는 초대를 했다.


나는 토요일 오후, 약속한 시간에 수진이와 함께 잭클린의 집에 놀러 갔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방문해보는 미국 중산층의 가정. 수진이와 나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잭클린의 집은 미국 서민층의 전형적인 하우스였다. 세 마리의 개를 기르고 있었고 뒷마당은 잭클린만을 위해 플라스틱 놀이기구를 들여놓고 개인 놀이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플라스틱 놀이기구를 구입한 것도 아이가 노는 데에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라며 맥도널드와 같이 좁은 실내 공간의 플레이룸에서 노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 설명을 길게 늘어놓았다. 나는 잭클린 엄마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게 미국 중산층의 일반적인 모습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흔히 할리웃의 영화로 접하는 미국 중산층은 원래의 모습과 거리가 많다. 이건 우리가 한국 영화를 보면 죄다 문제 가정에 비행 청소년, 문제인 부모만 있는 것처럼 그려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 역시 그 동안 줄곧 보아왔던 할리웃 영화가 ‘아메리칸 뷰티’나 ‘아이스 스톰’ 등 붕괴되는 미국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그린 영화들을 주로 보아왔던 터라 선입견을 많이 갖고 있었던 듯하다.


이곳으로 건너온 후,내가 보아왔던 미국 중산층의 모습은 ‘내 자녀, 가족이 우선’인 모습이었다. 주말에 어디를 가도 온 가족이 함께 가는 것이 당연했고 토요일, 일요일이면 집 잔디밭에서 자녀를 데리고 함께 노는 아버지들의 모습이며 공원에서는 바베큐를 굽고 자녀를 데리고 운동을 지도하는 등 이렇게 자상한 아빠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솔직히 이렇게 자상한 남자라면 ‘까짓 타인종이 무슨 상관일까’ 싶을 정도다. 자상한 남편을 원하는 여자들(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자들)에게는 미국 남자도 괜찮지 않을까? 한번은 장난삼아 수진이에게 ‘수진아, 엄마가 미국 사람이랑 결혼하면 어떨까?’ 지나가는 말로 물어본 적이 있었다. 헌데 수진이의 대답이 더 걸작이었다. ‘싫어, 그러면 내 동생이 한국애도 아니고 미국애도 아니잖아. 난 그런 동생은 싫어’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는 이 구절을 읽으며 엄마는 아직 철이 덜 들고 아이가 더 철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나는 결정적으로 수진이에게 이 대답을 듣고는 내 철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앞으로 절대로 장난삼아 실없는 질문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화목한 미국 중산층의 이야기를 하는 도중, 옆길로 샜지만 하여간 미국 중산층의 모습은 참 부럽고 함께 나누고 싶은 부분이었다. 한국에도 물론 이런 가정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한국 남자에 질린 나로서는 좀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하여간 잭클린의 부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나는 잭클린의 아버지가 50살이나 된다는 것을 알았다. ‘Oh, My goodness’. 농담도 잘 하고 스포티한 옷차림에 스키 고글 선글래스로 멋을 한껏 부린 이 멋쟁이가 50살이라니… 한국 남자라면 아마도 배 나온 아저씨가 됐거나 아니면 영락없이 축처진 볼품없는 아저씨 모습이었을 나이에, 이 미국 남자의 넘치는 활력과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잭클린의 엄마는 37살. 늦게 결혼해 잭클린을 얻었기 때문인지 잭클린 교육에 무척 신경을 쓰며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내가 수진이의 생일파티 해프닝을 이야기 하자 이곳 미국에서는 적어도 이주일 전에는 초대장을 돌려야 아이들을 생일 파티에 초청할 수 있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수진이와 나는 미국 사회에 차츰차츰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반쪽이 결여된 생활일 뿐… 나는 잭클린의 엄마·아빠와 제대로 된 가정의 모습으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맘 척척 알아주는 베스트 프렌드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다. 내미는 손과 이를 잡으려는 손이 한마음이라면 우리는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P.S

이 글은 수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쓴 글이다. 18년 전의 글인데 최근 나는 딸아이로부터 잭클린의 실체를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우연찮게 수진이 페이스북을 보다가 잭클린이 수진이 페이스북에 남긴 글을 보게 됐다. 그날 나는 '잭클린이 너 페이스북에 글을 썼더라' 하며 아는 척을 했다.


왠일인지 심드렁한 말투로 수진이는 "신경쓰지 마. 대답안할거야... "라며 무시를 하길래 "잭클린이 너 1학년 때 베스트프렌드 아냐?"라며 말을 이었더니 "엄마가 잭클린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어? 잭클린이 나한테 이상한 거 막 시켰단 말야...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잭클린이랑 안놀아"


그러면서 털어 놓는 말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잭클린은 방과후에 수진이와 함께 놀겠다며 자신의 집으로 수진이를 데리고 간 적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 집 뒷마당에서 벌레를 잡아서는 수진이에게 칼로 별레를 난도질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때의 충격이란? 아니 완전 사이코 아냐?


이 사실을 수진이가 한국 친구인 셀리(수진이와 멍키 바에 등장했던 친구)에게 말했더니 '잭클린 이상한 애니까 같이 놀지 말라'고 했다는게 아닌가? 이건 완전히 내가 그간 알고 있었던 수진이의 학교 생활과 완전 다른 내용이었다.


난 그날 수진이의 말을 듣고 많은 것을 반성했다. 난 정말 아이 교육에 관심 하나도 없었던 참 나쁜 엄마였던 게 틀림없었다. 반성에 반성만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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