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난 엄마와 수진이

싱글맘의 육아일기-23

by malee

채널 아일랜드를 다녀온 후, 심한 몸살에 걸려 약 3∼4일을 끙끙거리다 겨우 털고 일어났다. 대학교 4학년 때 심하게 감기 몸살을 앓은 후, 10여 년이 넘는 동안, 그렇게 아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오전 내 앓다가 마감을 하기 위해 오후에는 다시 회사에 나갔다 들어와서 앓고…


몸이 아픈 와중에 딱 한 가지 좋은 것 하나, 수진이가 군기가 팍 들어서 엄마 말을 그렇게 잘 들을 수 없었다. 아마도 지 딴에도 엄마 아픈 게 꽤나 걱정이 됐나 보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엄마! 나 학교 갔다 왔어요’ 한번 보고하고… 저녁 밤기운이 어슴푸레해지면 ‘엄마! 좀 나으셨어요?’ 깍듯하게 문안 전화 한번 하고…


침대에 누워 아프면서도 ‘평소에 이렇게만 하면 걱정할 게 없겠다’ 싶을 정도로 모범 초등학생(?)이 됐던 것이다.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지 않고 누워서 뭉기적거리는 아이를 몇 번이나 깨웠는데 내가 아프자 언제 그랬더냐는 듯 시계가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나 이를 닦고 세수하고 옷을 챙겨 입고 누워있는 내게 괜찮으냐고 아침 문안 한번 여쭙고…


이모가 학교에 데려다 주기 위해 집에 오면 얼굴에 아침 뽀뽀까지 ‘쪽’ 그렇게 여우를 떨 수가 없었다. 내가 몸이 좀 나아갈 무렵, ‘엄마, 이제 아프지 마… 엄마가 아프니까 내가 너무 귀찮아. 엄마가 물 갖고 오라고 하면 가져와야 하고, 이거 치워라 하면 치워야 하고… 알았지, 엄마?’

sally memo.jpg 몸살로 앓아눕자 갑자기 말 잘 듣는 학생이 된 딸아이가 남기고 간 메모.

결국 엄마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 불편하니까 엄마 이제 더 아프지 말라는 수진이의 말을 듣고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애라지만 어떻게 저렇게 지 아비랑 똑같아서 지 귀찮고 힘든 것만 알지 남 힘들고 귀찮은 건 내 알바가 아니지? 부전 여전이라더니…’


지 귀찮고 싫은 거는 손톱만큼도 하기 싫어하고 자신에게 싫은 소리는 단어 하나도 듣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질러버리던 애아빠 생각이 불현듯 났다. 사실 수진이의 모습에서도 많은 부분 애아빠 성격이 나타난다. 자신만이 주목받아야 하고 일등이어야 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지 성질에 못 이겨 어쩔 줄 모르는 수진이의 모습들이 요즘 들어 간혹 눈에 띄기 시작해 사실 나 혼자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엄마가 아이를 혼자 키운다는 것이 아이의 성격에 어떤 영향을 줄지 자신이 없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하려고 해도 성격도 천성이라고… 내가 그렇게 견디지 못해 하던 애아빠의 성격을 언뜻언뜻 내보이는 수진이를 어떻게 타이르고 얼러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이 있다.


하지만 이런 수진이도 학교에 가면 아무래도 주눅이 드는 모양이다. 지난번에도 한번 이야기했던 샐리 리라는 친구가 수진이네반 여자아이들의 대장 노릇을 하는 모양인데 한 번은 수진이가 ‘엄마 다른 반 아이들이 우리를 못살게 굴면 샐리 리가 지켜줘, 그래서 친구들이 샐리 리 보고 대장이래’ 하면서 그 녀석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아마도 요즘은 멍키 바도 옆으로도 하고 한 줄 건너뛰는 스킵도 곧잘 해서 샐리 리의 사랑(?)을 받는 모양이다.


수진이가 아직 영어가 자유롭게 구사되지 않으므로 한국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으니 이런저런 문제점들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아이들이 많다 보니 오히려 한국 아이들 놀이문화가 미국 아이들에게 전해져 미국 아이들과 ‘가위, 바위, 보’를 하며 놀거나 고무줄, 실뜨기 등의 놀이를 하고 노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한 번은 수진이가 미국 친구인 잭클린과 ‘가위 바위 보’를 하며 놀고 있었다. 잭클린 엄마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아이들끼리 노는 거니까 그냥 듣고 있다가 그게 한국말이라고 설명을 해주자 뒤로 넘어질 듯 웃어제꼈다. 가끔 잭클린이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을 잭클린 엄마가 쭉 말을 해주었다. 대충 들어보니 다 한국말이었다. 이렇듯 수진이가 다니는 학교에 한국 학생이 많아지면서 학교에 새롭게 생겨난 현상이라고 한다.


미국에 영어 배우러 와서 미국애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는 수진이를 포함한 한국 아이들. 세계화 시대라지만 아이들이 이루어내는 세계화의 흐름은 정말 너무나 빨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이렇게 세월은 빨리 흘러가고 수진이는 하루하루 다르게 이곳 생활에 적응해간다. 그런데 나는… 몸은 몸대로 지쳐가고 마음은 마음대로 그리움만 깊어진다. 그리움의 대상은 내 흘러버린 세월들… 두고 온 사람들… 무섭게 적응해나가는 수진이의 속도에 비례해, 내 그리움의 깊이도 자꾸 가슴속으로 속으로 뚫고 내려가니 어쩔 도리가 없다. 아마 이번 몸살도 과로와 그리움의 합작품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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