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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 Mar 12. 2024

정말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을까​​ ​

연애를 할지도 모르겠단 기대를 했다. 늘 실망한 적이 훨씬 많았으니까, 기대를 덜고 덜려고 노력했는데도 나는 다 덜지 못했나보다. 고작 일주일의 시간동안 어떤 사람과 나는 남자친구 여자친구 역할극을 했다. 그는 출퇴근을 할 때 꼬박꼬박 연락을 했고, 실없는 이야기들을 했고, 좋아한다고 자주 얘기했다. 나는 그를 좋아하는지는 잘 몰라도 연애의 규칙을 따르는 그런 행동을 좋아했다. 소중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덜컹거리며 급하게 출발한 만큼 급하게 멈춘 관계. 어이없게도 우리는 한 통의 전화로 끝나버렸다. 평소처럼 전화로 수다를 떨다 그는 내게 이상형을 물었다. 전에도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나는 이상형을 너무 구체적으로 말하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에둘러 대답했었다. 이번엔 왜 묻냐고 내가 물어보았다. 그는 자기가 바꿀 수 있는 게 있다면 나를 위해 바꾸고 싶다며 알고싶다 말했다. 나는 대답을 하기에 앞서 그렇다면 너도 나에게 바라는 게 있는지 물었고, 다른건 몰라도 만약 몸매에 대한 것이면 나는 좀 상처받을 것 같다 얘기했다. ‘혹시 그런 거야?’ 얼떨결에 핵심을 관통해버렸던 것인지, 그는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결국 그는 내 말이 맞다고 대답했다. 내가 지금보다 날씬해졌으면 좋겠단 욕심이 있다고 했다. 

 

이런 미친새끼! 턱끝까지 올라온 말은 차마 뱉지 못했고, 차분히 나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식이장애로 꽤나 고생한 적이 있었고, 나의 몸매에 대해 스스로 채찍질하지 않는 방향으로 회복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내 몸매에 대해 간섭하는 걸 바라지 않고, 연인이 그런다면 만날 수 없다 했다. 그는 내 가치관이 틀리진 않지만 자기의 것과 달라서 난처하다고 했다. 우리는 만나서 얘기해보자 말했지만, 곱씹어 생각할수록 너무 화나고 슬퍼서 굳이 이 사람을 또 봐야하나 하는 고민이 들었다. 

 

나는 다시 전화를 걸어 네가 하지 못한 말이 있냐 물었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충분히 전달했다고 했다. 나는 그러면 더 볼 필요는 없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해했다고 말하며, 자기가 천천히 알아가자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섣불리 고백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허, 참. 그게 미안할 일인가? 그는 내게 살을 더 뺐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곧 죽어도 사과하지 않았고 조금 빨랐을 뿐인 고백에 대해 사과했다. 마치 내가 좋다고 선언한 그 행위가 큰 오답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정리를 말하는 나의 말에 너무나 후련해 보이는 그 사과가 싫었다. 

 

어쨌든 나는 그를 대하는 동안 아쉬울 것 없이 솔직하게 내 마음을 말했고, 내 의지로 이 관계를 이어갈지 끝낼지 결정했다.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충분히 주도권을 가져온 내가 참 자랑스러웠다. 거절을 해야할 때를 놓치지 않는 내가 참 장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나는 버려지기만 하는 사람일런지 모르겠단 생각이 나를 덮치기도 했다. 빻아서 내가 차버린 그 남자에게 그리워하고 슬퍼할 부분이 있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아, 그가 어떤 남자건 간에 더 많이 사랑해주었음 했다. 내게 좀 더 매달려주길 바랬다. 그가 만족스러울 만큼 올바르지 않아도 그냥 붙들고 있고 싶기도 했다. 그치만 그의 태도를 미루어 보았을 때 내가 붙잡았어도 잡히지도 않을 사람 같았다. 진짜 쪽팔린다.

 

안정적인 연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과 나는 어디가 다른걸까? 정말로 무거운 몸무게 때문인가. 얼굴의 골격이 달라서일까. 털털한 성격이 과한걸까.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란 걸 머리로 알면서도 그게 정말 문제가 아니라는 걸 충분히 경험해 보았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싱글이라는 것은 어쨌든 내 모든 사랑이 망했단 증거다.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을 남겼건 간에, 나와 내 연인들은 매번, 단 한번도 빠짐없이 헤어졌다.

 

사랑을 끝없이 의심하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나의 아빠에 대해 말해야 한다. 지긋지긋한 그 이야기. 애착유형이니 뭐니 하면서 너의 인생은 유년기에 이미 망해버렸다는 기분 나쁜 공식. 나의 마음이 어떤 장소라면, 그 가장 근간이 되는 밑바닥에 단단한 금속 명패로 이렇게 새겨져 있을 것 같다.

 

‘네 아빠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까 넌 어떤 남자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어.’

 

한편의 으스스한 괴담 같다. 이 문장이 무서운 이유는 여느 괴담처럼,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는 모호함이 귀신처럼 나에게 달라붙는다. 한없이 약해져 있을 때, 귀를 막고 도망쳐도 끈질기게 감겨오는 목소리. 어린 내가 떠안아야 했던 하나의 저주이다.

 

아빠는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어디서 진단을 받은건 아니지만 아빠를 자폐 스펙트럼 속 경증에 속하는 사람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아빠는 돈을 좀 더 쓰고 더 벌어야 한다는 얘기만 반복했다. 마음의 부침이 많던 나는 내 얘기를 들어주지 못하는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아빠는 내가 힘들다는 걸 알기나 했을까? 그렇게나 발버둥을 쳤는데도 도무지 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빠는 나에게 제대로 시간을 쓸 줄 모른다. 내가 초등학생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시고 아빠는 금방 재혼했다. 새로운 부인은 나와 동생을 싫어했다. 재혼 후 아빠는 우리를 만나는 것을 들키면 곤란했는지 언제 보자는 말이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와중에 가끔 들를 뿐이었다. 미리 약속을 잡고 만나려 하면 약속을 말도 없이 파토내기 일쑤였다. 전화도 본인이 먼저 걸어서 받지 않으면 끝이고 내가 걸어봐야 받는 일도 거의 없다. 자연스레 나는 아빠에게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아빠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때는 친할아버지의 장례식 때였다. 우리 가족이 장례식에 참석한지 10분도 되지 않아 아빠는 부인이 싫어한다며 돌아가달라고 했다. 고작 몇 개월을 만난 애인이 나보다 중요하다니. 그날 마음속의 아버지를 죽였다. 그 사람은 그냥 데면데면한 중년의 남성일 뿐이다. 아마도 난 아빠가 날 그렇게 대한다는 사실을 곱씹으면, 되돌릴 수 없이 고장난 하자품인 걸 들킬 것 같아서 그냥 털어버렸던 것 같다.

 

깊고 깊은 곳에서 불안이 올라왔다. 자꾸만 음식을 욱여넣고 싶고 담배를 피고 싶었다. 나를 해치고 싶은 것 같다, 조금은. 끊어냈던 습관들도 다시 올라왔는데, 가령 내 몸의 군살을 꼬집어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살집이 있는지 살피게 되었다. 뿌리내리지 못하고 붕 뜬 기분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내가 배운 것들 중 좋은 것을 돌아보았다. 

 

최근에 춤 워크숍에서 내 몸의 장기를 감각하며 움직여보는 시간을 가졌다. 장기는 물기가 가득하고, 서로가 서로를 품어주고 있고, 그 자신만의 욕구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존재라고 했다. 터무니없게 들리지만, 그 말대로 해보니 정말로 가볍고 산뜻하게, 지치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내 몸은 이렇게 움직이고 싶었구나 하는 이해가 이성을 거치지 않고 순간순간 몸짓으로 튀어나왔다. 나에게 다가오는 세상을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그 단서들이 움직임을 일으키는 충동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하루는 그 날을 기억하며 공원을 걸었다. 망한 사랑의 고통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 걷기가 정말로 기뻤다. 눈에 담기는 풍경과 바깥 공기의 냄새와 웅성이는 소리들이 다시는 오지 않을 아름다운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저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잡념 없이 감각하고 반응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 덕분에, 모든 것이 괜찮았다. 덕분에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나를 깎아내지 않겠다 선언한 순간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온전히 현재를 살고 있는 나의 직관이 틀릴 리가 없으니까. 분명 또 흔들릴 테지만, 찰나처럼 지나가는 편안한 균형에 잠시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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