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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Aug 09. 2023

혼자 늙기 위해 필요한 것

한 부모, '부모'  그 다음

"혼자 오셨어요?"

"응. 혼자 왔지. 혼자 왔어?"

"네. 그럼 같이 올라가실까요?"

"좋지. 그런데 발이 맞을라나 모르겠네."


인적 없는 등산로 입구에서 아담하고 여린 체구에 머리가 제법 희끗한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났다. 폭염경보가 발령된 날에  아주머니 혼자 작은 힙쌕 하나 달랑 메고 산에 오르시다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염려되어 등산 벗이 되어 드리기로 했다. 나로 말하면 폭염을 뚫고 영남알프스 2봉 연계 산행의 대업적을 이룬  골격근량 24.2kg, 체지방률 16%의 타고난 근수저가 아니던가? 거기다 등에 짊어진 배낭에는 시원한 생수 5병과 ABC초콜릿 한 봉지가 있으니 위급한 상황에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발이 맞으려나 모르겠다는 아주머니 말씀의 참 뜻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데크로 만든 임도를 지나 다녀간 사람들의 발걸음과 시간이 만들어낸 날 것 그대로의 산길에 접어들자 아주머니는 나를 가볍게 앞질렀다.


"헉헉. 산을 엄청 잘 타시네요. 완전히 날다람쥐 같으세요."

"지금은 늙어서 몸 사리는 거야. 예전엔 뛰어다녔어."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나? 칠십하나."

"네?"

"잠깐 쉬었다가 갈까?"

"네."


산 중턱 바위에 앉아 아주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너무 크고 묵직해서 아주머니의 삶이 통째로 내 앞에 떨어진 것 같았다.


" 산 잘 타지?"

"네. 제가 못 따라갈 정도예요."

"내가 애를 못 낳아서 서른아홉에 이혼당했거든. 뭐 딱히 할 게 있나? 산악회 들어서 그때부터 산을 탔어. 내 나이는 그런 시절이었잖아. 지금처럼 부부지간에 통장 따로 쓰고 각자 월급 관리하고 그런 것 없는 시절. 힘들게 일해서 번 돈 남편 통장에 차곡차곡 모았는데 그냥 다 남편 재산인거지. 한 푼도 못 받고 몸만 나온 거야. 참 힘들었는데 내가 생활력이 강하거든. 다시 직장 잡고 열심히 살았지. 지금은 재밌어. 나 먹고 싶은 거 먹고, 좋아하는 산에도 다니고 재미있는 영화 개봉하면 영화도 보러 다니고, BTS콘서트도 가고... 나 아직 아미는 아닌데 BTS 엄청 좋아해."

"우와! 진짜 멋지세요!"

"뭘. 혼자 사니까 뭘 하겠어? 즐거운 걸 계속 찾아야지. 결혼은 했어?"

 "네.... 제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사람 사이 정보의 불평등은 관계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법. 이 거대한 이야기를 듣고 함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이름 모르는 아주머니의 삶을 통째로 들여다본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로 했다.


"저도 이혼했어요. 남편이 같은 여자랑 바람을 두 번이나 폈어요. 원래 많이 안 맞았는데 참다가 결국은 바람피운 걸로 이혼하게 된 거죠."

"애는 있어?"

"애는 둘인데 제가 키워요."

"그럼 오늘은 애들이 아빠한테 간 거야?"

"네. 처음인데 2주 연속으로 애들이랑 캠핑 간다고 데리고 갔어요."

"같이 가자고 안 해?"

"네. 지난주에 애들 말 들어 보니, 본인 여자친구랑 같이 간 것 같더라고요."

"그래. 남자 혼자 데리고 갔겠나..."

"네. 딸아이가 아빠가 비밀로 해달라 했다고 해서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보냈어요. 그리고 일단 처음 봐서 그랬던 건지 친절하게 잘 대해줬다고 해서 심각하게 생각 안 하려고요."

"그래. 혼자 애 둘 키우려면 건강해야 한데이. 몸에 좋은 것 많이 먹고, 시간 나면 이래 산도 타고."

"네."

"이제 갈까? 이제 저 고개만 넘으면 다 왔다."


아주머니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산을 탔다. 그리고 간월산 정상에서 조심히 잘 가라는 인사와 함께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헤어졌다. 아주머니가 왔던 길로 재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본 다음, 나도 신불산을 거쳐 영축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여름산은 헥헥 거리는 숨을 고르며 오를 가치가 있을 만큼 청량하고 예뻤다. 억새로 유명한 산이라 가을에만 예쁜 줄 알았는데 여름에 와 보니 입는 옷마다 멋지게 살려내는 산세가 예술이었다.(역시 사람이나 산이나 틀이 중요한 법이다.)

체력의 한계가 온 것인지 간월산을 지나 신불산에서 영축산에 이르기까지 3봉을 밟고 산을 내려오는데 가방에 짊어졌던 무게가 두 다리에 들러붙은 것 마냥 힘이 들기 시작했다. 잠깐 정신 줄을 놓으면 크게 다칠 수 있는 상태라는 직감이 왔다. 오를 때 절반도 안 되는 속도로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그렇게 오후 4시를 조금 넘겨 최종 목적지인 통도사 입구에 도착했다. 꼬박 6시간 30분 걸린 산행으로 인해 몸에서는 짠내가 입에서는 단내가 올라왔다. 여기저기 걸린 다양한 업종의 간판들을 보니 어디든 들어가 좀 앉고 싶었다. 통도사 인근 맛집을 검색해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찻집을 알아냈다.


"짤랑짤랑"


출입문 종소리에 체격 좋고 무섭게 생긴 주인아저씨가 굵직한 목소리로 나를 맞았다. 눈꽃빙수와 호두과자를 주문한 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젤리나 과일 같은 장식물이 일절 없는 투박한 모양의 빙수에 이어 삐져나온 살집이 매력적인 호두과자 한 접시가 내 앞에 놓였다. 먹어보지 않아도 맛을 가늠할 수 있지만 그래서 더 안 먹고는 못 배기는 맛. 익히 아는 그 맛 앞에 숟갈을 들었다.


설산의 고운 눈에 노란 흙 한 줌을 얹어 한 입.


"하~!"


아이들 없는 하루를 보람차게 잘 보냈다는 뿌듯함이 입안을 가득 적셨다. 틀이 멋진 산과 산벗이 되어 준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혼자 늙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내게도 곧 그런 시간이 올 것이다. 짬을 내어 산에 오르고 내 입에 맞는 음식을 먹으며 몸과 마음의 틀을 가다듬어 가는 시간. 오늘만 같다면 혼자서도 꽤 잘 늙어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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