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오기 전에는 늘 '다이어리'를 사요. 물론 새로운 다짐도 함께 하면서요.
더 솔직하게 채워야겠다. 기록하는 삶을 살자. 매일을 성실히 기록하자. 뭐, 이런 다짐들. 다이어리는 주로 월 단위와 일 단위로 기록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디자인을 선호해요. 만년 다이어리를 주로 사는데 직접 숫자를 적고, 1년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과정을 거치죠. 그저 직접 적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 계획하며 생활하는 유형은 아니라서 단순하게 월 별 일정을 확인할 수만 있으면 돼요. 일 단위 기록은 당시 제 상태를 기록할 수 있는 용도로 사용하죠. 이 마저도 불연속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아주 불성실한 기록인의 생활이죠. 이런 생활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졌어요.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가 볼까요. 일기를 써서 선생님께 제출하면 빨간펜으로 평이 적힌 채로 되돌아왔죠. 방학이면 늘 미뤄뒀다가 몰아서 썼고요. 읽는 이를 고려하며 쓰던 거짓 일기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탈 없는 하루하루였어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진짜 일기는 어디에도 적지 못한 채로 제 속에 차곡차곡 쌓였고요.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고 솔직하게 쓰지 못한 속내는 조용히 다이어리에 몰래 적어 뒀어요.
언제나 슬픔은 가까이에 있고 행복도 즐거움도 곁에 붙어 있다.
겨울이 찾아왔다. 긴 겨울이다.
괴로운 기억이 떠올라서 나는 빠르게 슬퍼졌다.
15분 거리를 35분 달리고, 버스를 타고 도착해서 먹고 싶던 빵을 먹고, 사고
아무리 울어도 누구도 나를 달래주지 않는 날이 있다.
매일 집으로 돌아가지만 매일 더 멀리 가는 것 같다.
다이어리에 적어 둔 문장이에요. 해가 지날 때쯤, 기억을 뒤적거려요. 흐릿한 어제가 선명해지기도 하고, 잠잠했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기도 하죠. 대부분은 여전히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많은 말들이 숨어 있는 백지를 마주해요. 그리고 다시 시작되죠. 새해, 다짐, 구매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매일을 성실히 솔직하게 기록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늘 새롭게 하면서 원하는 디자인의 다이어리를 골라요. 그리고 다시 다가올 1년을 머릿속으로 그려요. 꾸준히 기록하는 생활을 그려보죠. 물론 해의 마지막에 마주 할 공백이 더 크겠지만 이 과정을 포기할 수는 없어요. 저의 우여와 곡절을 담아 둘 창고가 필요하거든요. 서랍 안쪽에 가만히 넣어두고 울고 싶을 때,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꺼내 푸념을 늘어놓을 수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추적관찰할 수 있다는 가장 큰 이유가 있어요. 늘 같은 매일을 보내는 것 같지만 항상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스스로를 알아챌 수 있거든요.
23년의 다이어리를 들춰봤어요. 제주로 이사를 했고, 맛있는 곳에서 저녁을 먹었네요. 가고 싶었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고요. 아픈 기억에 울었던 날도 없고, 넘치는 화를 쏟아낸 장도 없네요. 지난 몇 년 간의 저보다 조금 많이 가벼워진 것 같아요. 아주 많이.
24년의 다이어리는 벌써 사 뒀어요. 1월의 숫자들도 다 적어 두었고요. 물론 새로운 다짐도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