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nah Nov 09. 2023

선생님을 좌절시키는 학생

예민해서 사소한 사건에도 스트레스를 받고 해소를 잘 못하는 나와는 반대로, 남편은 평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쌓아두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매우 적고, 혹여 조금이라도 스트레스가 쌓이면 즉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자기 보호과정'에 돌입한다.


그런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이번 학기에 맡게 된 석사과정 학생 중 일부가, 챗GPT를 이용해 짜깁기로 쓴 에세이를 아무런 레퍼런스 작업 없이 자신들이 쓴 것인 마냥 제출한 것이다. 남편은 대학의 AI정책수립팀의 리더이기도 한데, 그런 그에게 학생들의 속임수 혹은 부정행위는 솎아내기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수정 피드백을 받았음에도 몇몇 학생들이 끝까지 부인하거나 수강을 철회하고 다른 과목으로 옮겨가려는 시도를 했다는 데 있었다.


학생들의 성장에 늘 진심인 남편은 이번 사태에 크게 실망했다. 잘 모르는 것은 괜찮지만, 거짓과 기만의 태도는 그가 학생들로부터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모습이었다. 특히나 그들이 졸업 후 영국 내(혹은 본인들의 나라로 돌아가) 초중고 어딘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살아갈 교사들이 된다는 사실에 그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몇 번까지 주어야 하는 것인가? 개선의 의지가 없는 학생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논문을 표절하면 안 된다. 그것은 도둑질과 다름없다.


이 단순한 사실에 어떠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일까. 얼마나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자랐든 이 심플한 명제를 부인한다는 건 그저 도덕적 결함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럼, 도적적 결함이 회유와 설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남편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동료 교수들과 일주일 내내 논의하고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그 학생들과 설왕설래했다. 그러나 뾰족한 대책 없이 답보상태다. 남편과 친분이 있는 피드백 분야의 세계권위자 한 분은, 학생들로 하여금 '작업비디오'를 만들도록 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셨다. 학생들은 숙제를 이중으로 하게 되는 셈인데, 자신이 에세이를 쓰면서 어떤 책, 웹사이트, 저널등을 어떻게 참고했는지 그 과정을 담은 짧은 비디오를 만들어 완성된 에세이와 함께 제출하는 것이다. 표절을 막고 과정의 진실성을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 같다. 하지만 과제의 부담이 커진 학생들의 반발이 예상되는 건 불 보듯 뻔하다.  


그가 이런 식의 좌절을 경험하는 건 처음이다. 너무나 도와주고 싶은데 막상 도움을 받아야 하는 쪽에서 잘못을 부인해 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남의 것을 훔쳐 쓴 학생에게 그건 잘못된 행동이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함께 제자리로 돌려놓자고 했지만 그 손길마저도 뿌리치는 상황. 남편이 학생들의 성장을 토록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의 좌절이 조금은 덜했을까. 그는, 진심으로 상처를 받은 듯 보인다.


다른 의미이지만, 내게도 좌절의 경험이 있다. 살면서 그렇게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하고 있던 개인과외를 모두 접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내 능력에 큰 회의가 들었던 사건(?).


대학을 다니는 내내 과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휴학을 하지 않았던 시기에도 과외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난 늘 육체적으로 지쳐있었다. 그래도 고등학생들을 만나 함께 공부하던 시간들은 진심으로 좋았다.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고 싶었고, 내 진심이 전해지고 함께 노력하여 아이들 성적이 올라가면 내 점수가 오른 것처럼 기뻤다. 그런 내게 딱 한 번, 딱 하루, 그 일이 일어났다. 그 이후 오랫동안 기억에서 잊히지 않았던,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진 내게 큰 상처를 , 예민하고 우울한 나를 한동안 주저앉혔던 사건.


내 동생은 운동선수였다. 중학교 때 청소년대표로 활약하고 고등학교 때 국가대표로 발탁되면서 체에 진학했다. 동생의 과 친구들은 종목은 달랐지만 모두가 국가대표(혹은 상비군)들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정도의 타이틀을 위해서는 학교 수업보다 훈련이 우선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갑자기 어려워진 대학 공부는 또 다른 시련이었다. 중간고사를 앞둔 어느 날, 동생과 동생의 친구들이 내게 SOS를 청했다. 과목명은 '운동생리학', 대충 훑어보니 고등학교 때 배운 생물의 인간신체 확장판 같았다. 흥미를 느낀 나는 바로 오케이를 하고 날을 잡았다. 우리 집에서 모이기로 한 날, 동생 친구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종류의 수면방해제(?)를 가져왔다. 잔뜩 쌓인 캔커피와 독한 껌종류에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끼며, 나는 밤 10시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한 시간이 채 안되어 동생과 동생친구 L이

"언니, 도저히 안 되겠어, 잠깐만 눈 붙일게."

하더니 숙면에 빠져들었다. '아... 내가 너무 지루하게 말했나?'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깨어 있는 아이들을 위해 계속 이어나갔다. 두 시간쯤 지나 내가 '잠깐 쉴까?' 제안했더니 S는 고맙다고 말하며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그녀는 쉬는 시간이 끝나도 책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문제의 Y와 마주 앉았다. 총명해 보이고 눈이 너무 반짝여 가르치는 사람 마음을 설레게 한 아이였다. 중간중간 '여기까지 괜찮아? 이해가 됐어?'라고 물으면, '네 언니, 알겠어요, 정말 재밌어요'라고 말했던 Y. 그 아이와의 독대는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카페인 음료가 마치 수면유도제인양 전부 마시고도 잠들었던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한 캔의 커피만 마시고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와 장장 4시간에 걸친 수업을 한 Y. 그저 대견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 동생이 마치 별일 아닌 소식을 전하듯 내게 말했다.

"언니, Y, 운동생리학 0점 받았어. 과에서 빵점은 걔 하나래."


순간 나는, 할 말도 할 수 있는 반응도 모두 잃었던 것 같다. 그 허무함과 죄책감은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도와주지 못한 미안함을 넘어서, 내가 괜히 관여해서 0점이라는... 대학에서 받을 수 있는 점수인지도 몰랐던 그런 스코어를 기록한 게 아닐까... 자책의 시간이 길어졌다. 내가 애들을 가르쳐도 되는 사람인가, 해오던 일에 의구심이 들고 자신감을 완전히 잃었다. 20년 정도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좌절. 이제 겨우 그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약간의 심리적 거리가 생겼지만, 아직까지도 마음속에 이 경험에 대한 적확한 설명의 단어들을 찾지 못해 좌절과 우울한 기분들이 부유하고 있다.


좋은 학생들을 만나는 건 행운이다. 한국에서 대학에 재직하며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수재들을 가르쳤던 남편이 불현듯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말한다.

"내가 한국에서 가르쳤던 학생들은 정직하게 공부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훌륭한 아이들이었는데. 오늘따라 그 학생들이 너무나 그립네."

열심히 노력하고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 또한 행운이다. 이런 남편의 진심이 현재 그의 학생들에게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본다. 결국 마음을 다잡고 결심하고 성장하는 건 그들 자신이기에. 열과 성의를 다하는 조력자를 만났을 때 최대한 힘을 끌어올려 잠재력을 모두 발휘하는 순간을 경험하기를. 그래서 선생님과 학생 모두의 윈윈이 달성되기를.






 


이전 22화 조립 잘하는 여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