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건의 사용설명서를 꼼꼼하게 읽는 편이다. 태생이 예민하고 호기심이 많아 물건의 작동 원리에 관심이 많고 고장 난 물건을 고쳐보고 싶어 하며 실제로 도전하여 수리에 성공하는 경우도 많다. 요즘은 유튜브에 필요한 정보들이 넘쳐나서, 장비를 준비하여 제대로 된 비디오를 고른 후 순서만 잘 따라 하면 제법 프로페셔널한 수준의 수리도 가능하다. 모든 게 편리하고 문제가 신속히 해결되는 한국에서는 이런 능력이 발휘될 기회가 적었다. 하지만, 일 처리가 늦고 인건비가 비싼 영국에 오자 나의 이런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원하던 삶은 아니었다.
엔지니어인 친정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 집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기술적 문제들은 사람을 부르지 않아도 해결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아버지의 기술들을 어깨너머로 보고 자란 나는 대부분의 기계를 쉽게 다루고 그것들의 원리와 오작동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재수를 하면서는 혼자 하는 수학이 너무 힘들어 문과로 전향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이과였던 나는 수학과 과학을 국어나 영어보다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내향적인 나는 사람보다 기계가 쉽다.
사람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예민해서 잘하는 부분이지만, 잘한다는 게 쉽다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물건을 다루는 일은 쉽다. 조립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태스크라도 조립도를 따라 하나씩 해결하다 보면 어느새 내 손에는 완성품이 들려있다. 과정도 긴장이나 불안 없이 견딜 수 있다. 시작과 끝이 명확히 정해진 일들을 하다 보면 마음에 안정이 찾아온다.
얼마 전 시아버님이 가든퍼니쳐세트를 구매하셨다. 가든을 즐길 시즌이 지나자 대폭 할인에 들어간 세트 중 그동안 눈여겨보고 계셨던 하나를 덜컥 주문하신 것이다. 배달 기사님이 테라스에 놓아주셨지만, 박스들이 너무 무거워 시부모님께서는 열어볼 엄두도 못 내고 계셨다. 구두쇠인 시아버님은 크게 할인하고 있는 물건은 그냥 못 지나치신다. 필요한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인지 따져보기 전에 혹시 다른 사람이 그 딜을 채갈까 두려워 일단 구매부터 하신다. '굿딜'의 함정에 빠져 돈을 더 쓰게 되는 이 아이러니.
대략 이런 모습, 사진출처 Amazon UK
저녁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스피커폰으로 가만히 자초지종을 듣던 남편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게 오케이 사인을 받은 남편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걱정 마세요, 밥 먹고 7시쯤 갈게요'라고 당당히 말했다. 아버님댁에 있는 연장들은 백만 년 된 것들이라 대부분 녹슬고 제 기능을 못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우리 집에 있는 연장들을 챙겨 집을 나섰다. 엄마가 조립을 할 동안 게임타임을 허락받은 아들은 신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에 올라탔고, 조립을 못하는 남편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예측조차 못하기 때문에 그저 행복하게 아들의 노래에 휘파람을 얹으며 차 시동을 걸었다.
영국에 와서 모든 가구를 인터넷으로 싸게 구매했고, 전동드릴이 너무 비싸서 손으로 직접 다 조립했다. 다행히 힘이 센 나는(https://brunch.co.kr/@hannahwood/11황소, 힘이 센 아이 참고) 전동드릴만큼 단단한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가구 조립은 내게 'Therapeutic(치료적)' 행위에 가깝다. 정해진 순서대로 일을 진행하고 잘 조립된 완성품을 보면 대단한 성취감이 든다. 조립도의 1번 항목을 보는 순간 Oh no라고 탄식하는 남편은 절대 이해 못 하는 '이과 마인드'다.
박스를 모두 풀어놓고 조립도를 보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옆에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조언을 중언부언하고 있는 남편에게 '그냥 안에 들어가 있을래?'라고 얘기했겠지만, 시부모님 앞에서 남편의 기를 죽이고 싶지 않아 귀를 막고 조립을 시작했다. 평소에 아무리 사소한 것에라도 고마움을 많이 표현해 주시는 시부모님 역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테라스 한편에 자리를 잡으시고는 내게, '너무 고맙구나, 정말 똑똑하구나, 힘이 어쩜 그렇게 세니'등등 폭풍 칭찬을 하고 계셨다. 이러다 진도가 안 나가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옆에서 불만 가득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남편에게,
"해가 지니 좀 쌀쌀한데 부모님 모시고 썬룸에 들어가 있어."
라고 좋게 말했다. 그들이 사라지자 조립은 한 시간 만에 끝이 났다.
완성품 사진을 찍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며느리 작품이라고 자랑을 하고 다니시는 시어머님덕에 괜히 우쭐해진다. 내겐 아무런 스트레스 없이 할 수 있는 쉬운 일인데 누군가에겐 자랑할 만한 일이 될 수도 있다니. 기여도가 제로인 남편은 칭찬을 못 받는 상황에 심통이 나서 조립도가 자세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제대로 된 공구세트가 있었다면 본인도 도왔을 것이다 등등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았다. 말이 안 되는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아들을 나무라는 대신, 그에게,
"한나가 조립을 할 동안 우리랑 시간을 보내줘서 고맙다."
라며 칭찬인지 디스인지 모를 말씀을 해 주시는 어머니. 의미는 차치하고 감사의 외연을 하고 있는 문장이라 마음이 풀렸는지 남편이 더 이상 투덜대지 않았다.
싱크대 배관을 손보거나 배관공과 통화하며 낮아진 보일러 압력을 올리는 나를 보며 배관일을 배워보는 건 어떠냐고 남편이 묻는다. 그들은 교수인 남편보다 돈을 더 잘 번다. 잘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평생 하고 싶은 일은 아니기에 망설여진다. 전기기술자, 가구조립알바 등도 생각해 봤지만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여 그들과 대화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쿵쾅거려 진정이 안된다.
오늘도 아마존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높이는 Monitor adjustable riser 받침대가 배달되었다. 조립을 잘하는 아내 덕분에 아무런 고민 없이 조립 전 상품을 과감하게 구매하는 남편. 주말에 사둔 (겨울용) 롤블라인드도 설치해야 하는데... 핼러윈파티에 간 아이를 픽업하러 가기까지 두 시간 남짓 남았으니 그 안에 서둘러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