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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Oct 21. 2023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다른 인간관계를 포기해야 할까

극 J의 성향을 가진 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계획을 세우는 이유도, 가능한 모든 일을 예측해 놓고 불확실한 요소들을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으로 끌어오기 위함이다. 막상 일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많은 변수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무계획의 불안을 견딜 수 없다. 살면서 봐온 많은 시험들, 마감을 지켜야 하는 일들, 친구와의 사소한 약속들까지도 모두 철저하게 계획되었고 예외 없이 지켜졌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변수는 남편을 만난 일이었다.


전문가에게 진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어떤 체크리스트를 해보든 성인 ADHD가 의심된다고 나오는 남편은, 양쪽 부모님으로부터 난독증과 주의력 결핍의 유전적 요소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본인의 경미한 난독증을 알지 못했던 남편은 늘 학업을 따라가기 어려웠고, 그래서 학교는 그에게 지루한 곳이었다. 서른이 넘을 때까지도, 자신이 박사학위를 받은 뒤 대학에서 가르치는 직업을 갖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NHS search results for ADHD


성인 ADHD가 의심되는 그는 시간 약속을 잘 못 지킨다. 남편의 항변은, '시간 흐름의 상대성'이다. 그가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능력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얼마나 많은 시간적 여유를 두고 준비를 시작하든 그에겐 항상 같은 결과가 기다린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는 그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 같이 살고 있고, 내 눈으로 직접 모든 준비과정을 보면서도,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나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한 시간, 삼십 분, 십분, 분단위로 알람을 맞춰두고 준비를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고 아무리 옆에서 잔소리를 해도 제시간에 그를 집밖으로 끌어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철저한 계획하에 움직이는 내가 시간관념이 없는 혹을 둘(아빠와 아들)씩이나 주렁주렁 달게 되다니. 사회적 민감도가 높아 누구에게도 절대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나는, 혼자라도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해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과하고 싶지만, 눈앞의 압박마저 사라지면 남편은 마음 편히 늦게 등장할 것이 확실하므로 그것조차 할 수 없다.


마음이 따뜻하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남편에게 친구가 많지 않은 이유, 정말 궁금해하며 나에게 그 이유가 뭔지를 물어보는 남편에게,

"돈쓰기를 싫어하고('돈에 예민한 남편 1' https://brunch.co.kr/@hannahwood/63 참고)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데, 친구 사귀기 어려운 건 당연한 게 아닐까?"

라고 반문했다.


남편과 데이트를 하던 시절 내겐 친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런던에서 알게 되어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일 년 반 넘게 거의 매일 만나며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던 사이였다. 중국 공산당 고위간부인 강퍅한 아버지 밑에서 엄격하게 시간 개념을 배우고 자란 그 친구에게, 항상 5분 일찍 약속 장소에 나와 있는 나는 '이상적인 친구'였다. 예민한 성격도 비슷해서 같이 있는 시간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미각이 예민한 우리는 런던의 맛집들을 함께 찾아다녔고, 소음에 예민한 우리는 조용한 공원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앉아있길 좋아했다. 표정만 봐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 역시 눈빛만 보고도 내 기분을 정확히 짐작했다. 그렇게 친했던 그녀에게 남자친구(현재 남편)를 처음, 정식으로 소개하려고 한 날이었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남자친구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문자를 보냈지만 감감무소식, 전화도 받지 않았다. 삼십 분쯤 지나 겨우 연결된 통화, 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에서 피곤함이 느껴졌다. 퇴근 후 잠시 눈을 붙였는데 약속시간이 다됐고 옷을 바꿔 입으려는데 계속 마음에 안 들었고 블라블라... 그를 사랑했지만 잘 몰랐던 시절이었다. 그는,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변명들만 잔뜩 늘어놓았다. 전화를 끊자 친구가 말했다.

"기본적인 태도의 문제 아니야? 여자친구의 친구를 만나러 나오는 자리에 어떻게 이렇게 늦을 수가 있어? 너 그런 취급을 받는 게 괜찮은 거야?"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더 속이 상했다. 시간약속하나 못 지키는 남자와 헤어지지 않는 나를 이해 못 한 그 친구는 결국 시간을 두고 점점 멀어져 갔다. 나의 연애는 계속되었고, 시간개념이 전혀 없는 남자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 남편에게도 좋은 친구가 셋이나 있다. 인생친구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밑바닥을 다 보여주고도 서로가 서로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는 그런 관계. 셋 중 두 명(동생의 남편인 제부 포함)은 나와 성격이 비슷하고 사랑에 버금가는 우정의 힘으로 남편의 단점을 보듬어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다. 나머지 한 명은 남편과 똑같은 성격의 소유자인데, 남편과 그녀가 만나기로 약속하면 둘이 실질적으로 만나는 시간은 늘 약속 시간보다 2시간 정도 후가 된다. 레즈비언이며 런던 남부 대테러팀에서 형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따뜻하고 투명한 마음을 가진 좋은 사람이다. 런던 윔블던의 내 친구 집에서 남편, 아이와 함께 며칠 신세를 졌던 때가 있었는데, 남편은 자기 집도 아닌 곳으로 친구인 그녀를 불렀다.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가량 늦은 그녀는, '친구의 와이프의 친구집'에 저녁 늦게 와서 두 시간가량 수다를 떨다 돌아갔다. 눈치 보지 않고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그들을 보며, 아니 정확하게는 그들을 용인하는 나를 보며 내 친구는 '보살'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지난여름에 만나 한 달 정도 휴가를 함께 보낸 동생이 웃으며 말했다.

"형부랑 살다 보니 언니도 변하는구나. 언니는 안 변할 줄 알았는데... 많이 변했어."


침구를 정확하게 선에 맞추어 정리하지 않으면 잔소리를 하던 언니가, 뱀 허물 벗듯 옷을 이리저리 벗어던지는 남자를 만났다며 고소해하던 동생이었다. 내 인생은 왜 중간이 없을까? 동생에게 불필요한 잔소리를 좀 하고 살았다고 해서 이렇게 극단적인 케이스를 떠안아야 되는 것인가? 과거에 사람들에게 시간 약속 좀 잘 지키라고 얘기했다고 해서, 이렇게 예외 없이 대놓고 약속에 늦는 남자와 평생 세트로 묶여버린 것인가? 뭔가 억울하다.


깨끗한 놈과 더러운 놈이 살면 결국 더러운 놈이 이긴다. 논리와 무논리가 만나면 결국 무논리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예민한 사람과 둔한 사람이 살면 예민한 사람만 깨진다. 계획과 무질서가 부딪히면 계획이 와르르 무너진다. 오늘도 이 믿고 싶지 않은 진리를 한 번 더 되뇌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어차피 이기지 못할 거 힘 빼지 말자.


약속을 못 지켜 사람들이 떠나도 나는 남편곁에 있어줘야 하기에.


오늘도 외출 한 시간 전부터 카운트다운을 외친다. 쑥대밭을 만들며 집을 나설 남편과 아이가 못 미더워 빗자루로 쓸어내듯 두 사람을 집밖으로 밀어낸다. 지금 당장 나가야 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십 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모처럼 제시간에 집을 나서보나 했는데, 차에 먼저 탔던 아이가 급하게 소리친다.

"엄마, 잠깐만, 나 충전기 가져가야 돼!"

이때다 싶은 남편도 은근슬쩍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그래, 마음을 비우자, 오늘도 제시간에 가기는 글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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