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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올 Nov 03. 2024

나는 기차화통처럼 말해요

큰 목소리 때문에 운명이 바뀐 여자 이야기

사람들은 화가 나면 서로의 가슴이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 거리만큼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소리를 질러야만 멀어진 상대방에게 자기 말이 가닿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화가 많이 날수록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소리를 지를수록 상대방은 더 화가 나고, 그럴수록 둘의 가슴은 더 멀어진다.

그래서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저자류시화출판 더 숲발매 2017.02.25.





나는 어릴 때부터 목소리가 매우 컸다.

어머니는 배 씨 집안 여자들이 목청이 다 크다고 늘 말씀하셨다.

어찌 되었든 어머니가 알고 있는 배 씨 여자 둘인 큰고모와 막내 고모는 목소리가 크셨다.

부산 감천동에 사셨던 고모의 목소리는 감천마을에서 목소리가 제일 컸다고 다.

해 질 무렵이면 놀이에 빠져 집에 돌아오지 않는 언니 오빠들을 부르기 시작하면 동네 골목골목이 쩌렁쩌렁했다고 했다.

"이중아~~~"

"이중아~~~"(고종 사촌 막내 이름)

나는 어쩌면 고모님들 보다 목소리가 더 큰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와 팔짱을 끼고 길을 걸어가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주

"공주야,  귀청 떨어지겠다.  살살 말해."(어머니는 지금도 나를 공주라고 불러주신다)

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내가 왜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는지 모른다. 보통 청력이 좋지 않으면 자기가 잘 안 들리니까 크게 말한다고 하는데 나는 도시에 살 때는 종종 아파트 위층에서 들리는 휴대폰의 진동소리까지 잘 들 정도로 청력이 좋다. 어릴 적 몇 개의 별명 중에 '소머즈'라는 별명도 있었다. 아주 멀리서 나는 작은 소리도 잘 듣는 '소머즈' 말이다.



디젤기관차 화통



  그냥 타고난 목청인가 보다. 나는 결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었다.그냥 목소리가 큰것이다.

조심조심 말하고 싶고 TV에 나오는 아나운서같이 조신하게 말을 하고 싶지만

잘되지 않았다. 바짝 신경을 써야 목소리가 작아졌다.

 목소리 때문에 낭패를 당한 적도 많다. 짝꿍이랑 떠들어도 내 목소리가 크기 때문에 떠든 사람 이름을 적는 칠판 구석에 종종 내 이름이 있었다. 같이 떠든 친구들의 이름은 없고 내 이름만 있다. 억울했지만 그랬다. 내가 미치지않고서야 혼자 떠들진 않을텐데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내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다 녹음된 내 소리를 듣게 되면 너무 부끄러웠다.

하지만 종종 십 대 시절엔 전화 목소리가  114전화 안내원 같다는 소리를 어른들께 듣기도 했다.




  국민학교 때부터 운동 신경이 탁월했던 나는 줄 곳 운동선수 제의를 받았다. 실제로 학교 대표육상 선수로 뜀박질을 하기도 했다. 6학년이던 1983년에는 88 올림픽을 대비한  '88 올림픽 꿈나무'로 선발되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어머니를 불러 운동을 시키자고  두 번이나 권하셨지만 어머니는 거절하셨다고 했다. 아마 운동하는 딸보다는 공부를 잘하는 딸을 원하셨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머니는 훗날 내가 승부욕이 없고 인생이 이기고 지는 것이 다가 아닌데 그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으셨다고 했다.


고무줄을 끊거나 여학생들을 놀리는 남학생들은 늘 내 손에 응징(?)을 당했다. 중학교에 가서도 체육 선생님께서 체고를 가라고 3년 내내 권하셨다.



88올림픽 포스터, 마스코트 호돌이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면 나는 다른 운명으로 살고 있을까?


중 3 가을이었다. 고등학교 시험인 연합고사를 두 달도 안 남긴 때였다. 갑자기 음악선생님께서 방과 후 음악실로 매일 오라고 하셨다. 한 달 정도 음악실에서 '시창청음'을 공부했다. 선생님께서 들려주는 피아노 연주를 듣고 오선지에 음표를 그렸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악보를 주시면 악보를 보고 노래를 해야 했다. 그렇게 한 달 공부를 하고는 나는 국립국악고등학교에 합격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최초로 특목고에 합격한 학생이 되었다.(졸업 후 거의 30년 만에 체육선생님과 통화가 되었는데 내 이름은 말씀드렸더니 나의 성씨는  내가 진학한 학교까지 알고 계셔서 깜짝 놀란적이 있다.) 내가 음악적 소질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 되었던 전국에서 100병밖에 뽑지 않는 국립국악고등학교에 나는 턱 하니 합격을 했다.  (당시에는 고등학교도 입학시험을 봤는데 연합고사라고 불렸다. 그 해 국악고등학교 커드 라인이 180점(200점 만점 중 20점이 체력장 점수)이었다고 하니 나는 평소 모의고사보다 시험을 잘 보았던 것 같다.) 음악선생님께선 나의 목청이면 판소리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시고 그 학교 입시를 준비시키신 것이다.




재학 당시 민요와 판소리를 가르치시던 안숙선 명창님

아뿔싸!

내게 소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미 입학 전부터 소리 전공을 한 친구들이 4명이 있었다. 학교에선 전공을 정할  때 대학교 입학생 비율로 학생들을 나누었다. 입학 전 전공자들을 우선 배정하고 나머지를 비전공자 학생들을 채웠다. 현악기는 가장 많이  뽑았고 소리와 이론 전공은 몇 안 되었다. 작년인가에 알게 된 사실인데 소리 전공자 중 한 명인 유미리는 5살 때부터 소리를 배운 친구였다.

지금도 여전히 소리를 하고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나는 소리가 아닌 기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내가 원했던 대금을  하지 못하고 피리를 전공하게 되었다. 나는 피리를 사랑하지 못했고 결국은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이 되기 전에 하는 봄방학 때 자퇴를 했다. (국악고를 가려고 휘문고를 자퇴하고 3수 한다는 학생 이야기를 듣고 여러 생각이 오갔다. 그때 내가 국악에 진심인 누군가의 기회를 뺏은 건 아닐까 하는 등등의 생각)  국립이라 모든 학비 일체가 무료였는데 자퇴를 하면서 1년 치의 학비를 물어내야 했다.  피리가 싫어서 그렇게 떠난 학교였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웬일인지 피리 소리가 좋아졌다.



피리의 종류 나는 주로 향피리를 연주했다




  국악고를 다닐 때 3학년 통틀어 남학생은 30여 명 정도 나머지 270여 명은 모두 여자였다. 예체능 계통의 학교가 그렇듯 우리 학교도 선후배 관계가 보통이 아니었다. 선배에게 찍히면 앞날이 불투명해진다. 국악을  계속하는 한 선배의 그늘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버스를 타고 가는데 창밖으로 선배와 선생님이 보이면 선배한테 먼저 인사를 하고 선생님께 인사를 할 정도였다. 국악고등학교에 다닐 때 선배들한테 두 번 불려 간 적이 있다. 그 시절엔 화장실로 불려 가는 게 보통이었다.


  두 번 불려 간 이유 중 하나가 체육시간에 내 구령 소리가 너무 커서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학생과 너무 친하게 지낸다는 것이었다. 구령은 원래 크게 붙여야 하는 것이고 성격이 활달하고 남자 같다 보니 남자친구들과 허물없이 잘 지냈는데 이 두 가지 때문에 선배들한테  찍혔던 것이다. 딱 1년 다닌 학교지만 지금도 나는 여자 동기보다  남자동기들과 더 자주 연락을 하며 지낸다.




  1998년 2월에 자퇴를 하고 1989년 19살이 되던 해 미림여고 1학년으로 입학했다. 동급생보다 2살 혹은 3살이 많은 나이로 1학년이 된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려면 입학 전해에 시험을 봐야 하는데 2월에 학교를 그만두는 바람에 그해에 입학을 못하고 다음 해에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특목고에서 일반고등학교로 전학이 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면 나는 음악선생님의 부름을 받지 않았을까? 그러면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자퇴하지 않았을까? 체고에 가고 체대나 체육교육과에 가서 체육 선생님의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면 올림픽에 참가하고 메달을 땄을까?

2살이나 많게 입학하고 두 살이나 많게 졸업하지 않았을까?




  나는 화가 나서 목소리를 커진 것이 아닌데. 심지어 부부 싸움을  할 때면 평소 반말 존댓말 섞어서 하던 말투도 바로 존댓말로 바다. 존칭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거나  미운말을 하지는 않게 되니 나는 화를 내지 않으려는 방책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화가 나면 소리를  더 작게 했다.목소리를 저 아래로 쭉 내려깐다.



  

인생은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것이 맞나 보다.


세 번째 대학 생활 중인 나는 요즘 제일 많이 듣는 칭찬이

"배쌤은 목소리가 참 좋아요."

이다. 내 목소리가 잘 들리고 전달력이 다고 한다.

낭독을 하자. 시 낭송을 배워봐라. 강의를 하면 잘하겠다 등등

오랫동안 콤플렉스였던 나의 목소리는 요새는 자랑거리가 되었다.

얼마 전 과제로 녹음 과제가 있었다.

녹음을 들은 학우들에

"와, 완전히 아나운서 목소리네. 진짜 배쌤 목소리 맞아요?"

라며 칭찬해 주었다.




핀터레스트 제공



  나는 생업으로 퍼플 섬에서 보라호떡을 굽는다.  

"호떡 드세요. 보라 호떡!"

내 목소리가 바다 건너섬까지 들린다며 손님들이 내 목소리를 듣고 호떡을 드시러 왔다는 소리를 가끔 듣는다.



내 목소리가 크기는 큰가 보다. 그냥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잘 들리는가 보다. 목소리 덕에 나는 평범하지 않은 학창 시적을 보냈다.

17살, 19살에 두 번 입학했고 자퇴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의 삶은 정해진 운명일까?


  시의 내용과는 좀 다른 전개의 이야기였지만 시를 통해서 나의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소리를 지를수록 상대방은 더 화가 나고,

그럴수록 둘의 가슴은 더 멀어진다.

그래서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슴이 멀어지지 않도록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아야겠다.

특히 남편과 아이들에게 말이다. 남들이 칭찬하고 부러워하는 예쁜 목소리를 잘 사용해야겠다.



  참, 얼마 전 그림책 공부 중에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라는 책을 읽었는데 진행하시던 교수님께서 '나는 000처럼 말해요.' 안에 글자를 넣으라 하셨는데


나는"나는 기차 화통처럼 말해요"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목소리가 크다.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하루 종일 말을 해도 목소리가 쉬지 않는다. 운동회때 나의 목소리는 진가를 발휘한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기차 화통처럼 말할 것이다. 기운이 떨어지지 않는 한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큰 내 목소리를 부끄러워지는 않을 것이다.



I Talk Like a River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원서저자조던 스콧출판 Walker Books발매 202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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