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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노마드 함혜리 Jan 09. 2020

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

서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자이크화

이탈리아 북동쪽 아드리아 해와 면한 곳에 위치한 라벤나는 역사와 예술의 도시로 유명하다. 피렌체와 베니스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개인적으로 로마, 피렌체, 밀라노, 베니스, 나폴리 등지를 여행하고 이젠 이탈리아를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음을 일깨워 준 곳이다.

라벤나는 인구 16만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유적지가 8곳이나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바빠도 두 가지는 반드시 보고 가는데 산 비탈레(San Vitale) 성당과 단테의 무덤이다. 비잔틴 모자이크가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고, 르네상스를 연 작가 단테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니 일부러라도 가 봐야 할 곳이다.

피렌체에 머물면서 당일로 다녀왔는데 떠나기가 아쉬웠을 정도로 매력적인 도시였다. 피렌체에서 볼로냐까지 기차로 2시간가량 가서 지역 기차로 갈아탔다. 기차는 한참을 연착한 뒤 40분 만에 라벤나로 데려다줬다. (올 때에는 피렌체로 바로 오는 기차 편이 있어 그것을 이용했다. 역시 30분 넘게 연착.)

역에서 길을 건너 시내 방향으로 10분 정도를 걸어가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한적했다. 알고 보니 점심시간이었다. 이 도시에서 뜨거운 여름 낮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어디가 좀 이상하거나 나 같은 관광객인 듯했다. 다행히 산 비탈레의 매표원은 일을 하고 있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은 팔각형 몸통 위에 돔이 얹혀있는 특이한 외관을 하고 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삼각형 지붕에 길쭉하고 네모난 모양의 성당을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반면 산 비탈레는 돔과 출입구, 계단 탑과 같은 로마 건축의 요소와 다각형에 폭이 좁은 비잔티움의 요소가 결합해 있다.

당시 비잔티움의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482~565)였다. 그는 옛 로마제국의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해 수복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을 짓도록 한다. 이때 비잔티움의 건축 양식이 이탈리아에 도입됐다. 성당은 겉에서만 보면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기에 덤덤한 마음으로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로마와 비잔틴 양식이 결합된 외관의 산 비탈레 성당.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한 햇살과 뜨거운 바깥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안으로 들어서니 어둡고 서늘했다. 잠시 실내의 어둠에 적응한 뒤 눈을 들어 빛이 들어오는 제단 위쪽을 바라봤다.

이건 뭔가?

분명 한 낮인데 천장에는 반짝이는 별이 가득한 우주가 보인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 채광창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아 둥근 천장을 화려하게 수놓은 것은 1500년 전 예술가들이 그려놓은 모자이크화였다.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수많은 시간이 무색하게 간직한 아름다움, 숨이 턱 멎는 것 같았다. 명상적이고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신비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산 비탈레 성당이 지어진 것은 라벤나가 동고트 왕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때다. 527년 에클레시우스 주교 때에 짓기 시작해 동로마의 라벤나 총독부 시대인 548년 라벤나의 제27대 교구장 막시밀리아누스 때에 완공되었다. 산 비탈레 성당은 비잔티움 양식을 따라 건물의 외관은 수수하나 내부는 대리석과 모자이크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이곳의 모자이크는 콘스탄티노플(터키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에 버금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자이크란 다양한 색깔의 돌이나 도자기, 유리, 타일, 조개껍데기 등으로 만든 작은 조각을 눌어 붙여 만드는 그림이다. 조각들이 작을수록 더욱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무수한 조각을 끼워 맞추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변색이 적고 내구성이 뛰어나다. 장식적인 것과 실용적인 면을 두루 갖춰 건물의 벽, 바닥 장식에 널리 사용됐다. 모자이크는 비잔티움 시대에 전성기를 이뤘다. 다양한 소재의 유리와 금박을 모자이크에 넣어 모자이크는 더욱 화려해졌다. 모자이크 조각의 각도에 변화를 주어 영롱한 빛을 반사하도록 하면서 그리스도교 전례를 위한 영적인 공간에 화려하고 섬세한 모자이크화가 설치됐다. 동로마 제국에 소피아 성당이 세워질 무렵 서로마제국의 수도 라벤나에는 산 비탈레가 세워졌다.  

중앙 제단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름답고 정교한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십자형으로 4등분 된 둥근 천장은 빈틈없이 잎과 과일, 꽃 등이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묘사된 예수가 그 정점을 이루고 있다. 예수를 사방에서 네 명의 천사가 호위하고 있다. 높이 난 3개의 채광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모자이크를 비추며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채광창 아래로 자주색 옷을 입은 예수가 우주를 상징하는 파란색 구에 앉아있고 그 옆으로 성당을 봉헌하는 주교와 이 성당의 기초가 되는 비탈리 성인이 자리 잡고 있다. 양 측면으로 유명한 모자이크 패널이 있다. 왼쪽에는 궁정 관리와 막시미아누스 주교, 근위병과 부제를 거느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모습이 담겨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머리에는 성인처럼 후광이 그려져 있고 손에는 황금으로 된 성반을 들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왼쪽의 병사와 오른쪽의 성직자는 그가 속계와 종교계 모두의 지도자임을 상징한다. 인물들은 V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유스티니아누스가 맨 앞 가운데, 그 왼쪽에 막시밀리아누스 주교,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을 그들 뒤로 배치해 놓았다.

오른쪽에는 테오도라 황후가 시녀들을 거느리고 있는 모자이크화가 있다. 왕관과 보석을 몸에 두른 황후의 머리 뒤에도 후광이 빛나고 있다. 엄숙하고 절제된 황후를 마치 여신처럼 묘사했다. 모자이크화 속 인물과 동물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의상의 주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붓으로 그린 것 같다.

그 아래 사방으로 빼곡하고 정교하게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다. 각각의 면에는 꽃, 새, 별, 짐승, 공작새 등으로 덮여 있고 아치 위의 양쪽 면에는 두 명의 천사가 원반을 들고 있다. 그 뒤로는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이 그려져 있다. 이 도시들은 인류를 상징한다. 아치형 채광창 위에는 아브라함과 멜키체덱의 이야기, 모세와 예레미야와 이사야,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우두머리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성당의 모자이크 그림은 헬레니즘과 로마시대의 전통에 따라 제작됐다고 한다. 다채로운 색채와 확실한 원근, 풍경과 식물, 동물의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표현은 돌로 만든 모자이크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성당을 한 바퀴 돌면서 보니 바닥에도 아름다운 모자이크 장식이 되어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대로 떠나기 아까울 정도였던 성당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뒤로 약 50m 거리에 자그마한 벽돌 건물이 보인다. 유명한 갈라 플라치디아의 무덤이다. 산 비탈레보다 수십 년 앞서 지어진 무덤형 교회다. 초기 기독교 건축물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이곳은 십자가형 평면을 이루며  네 팔 부분을 배럴 볼트( 2차원 아치를 3차원 터널식으로 구성한  구조방식)로 마감했다. 볼트 구조로만들어진 네 개의 팔 부분 천정과 겹치는 부분의 돔 천정은 모두 단순하지만 순수하게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

4세기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장남인 아르카디우스와 차남 호노리우스에게 로마제국을 물려준다. 형은 동로마를 차지하고 동생은 서로마를 넘겨받아 라벤나를 수도로 삼는다. 게르만의 침략이 있으면 바로 동로마로 피신하기 위해서였다. 갈라 플라치디아(388~450)는 호노리우스의 여동생으로 닭 키우는 것이 취미였던 무능한 오빠를 대신해 서로마를 통치했다. 갈라 플라치디아는 후에 호노리우스와 공동 황제가 되는 콘스탄티우스 3세와 결혼해 25년간 서로마를 섭정했다. 예술을 후원했던 여제는 생전에 자신과 가족을 위해 묘역을 조성했다.

‘양들을 돌보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 모자이크화. 이 그림을 둘러싼 추상적인 문양들은 에덴 동산을 의미하고 있다.

십자가 형태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묘역은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가득하다. 눈높이에는 추상적인 문양을, 고개를 들어 보이는 곳에는 ‘성 라우렌시오의 순교’와 ‘양들을 돌보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 등 성인이나 여러 상징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천장에는 승리의 십자가와 수많은 별이 장식되어 있고 각 면에는 복음서를 쓴 성자들이 그려져 있다. 네 복음서를 보관하는 책장, 물을 먹는 비둘기의 모습 등 세밀하고 사실적인 모자이크에서 갈라 플라치디아의 성향과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단테의 무덤까지 보려면 시간이 많지 않아서 산 비탈레 성당을 나서야 했지만 모자이크의 영롱한 색채가 눈 앞에 아른거린다. 단테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에 ‘라벤나 페스티벌’ 사무국이 있기에 들어가 프로그램을 문의해 보니 그레고리안 성가를 연주하는 음악회가 그날의 유일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장소가 산비탈레 성당이었다. 그날 아니면 감상할 수 없는 음악회를 놓칠 수 없었다. 피렌체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을 보니 음악회를 봐도 될 것 같았다. 음악회 입장료를 물어보니 단돈 1유로(약 1500원).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스케줄을 정한 뒤 단테의 무덤을 찾아갔다.

시인 단테의 무덤

새로운 시대를 원했던 단테는 정쟁에 휩싸여 교황 지지파에 의해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고 궐석재판으로 사형에까지 처해진다. 피렌체로 돌아갈 수 없는 정치적 망명자의 처지로 루카, 베로나 등지를 떠돌다 라벤나에서 생을 마감했다. 조용한 주택가의 길 끝, 성 프란체스코 성당 바로 옆에 있는 작은 흰색 건물에 단테의 무덤이 있다. 단테는 베네치아를 다녀오던 길에 1321년 말라리아로 사망했지만 현재의 무덤은 그보다 훨씬 뒤에 지어졌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에 들어가면 베르나르도 카나치오가 쓴 비문이 담긴 단지를 볼 수 있다. 피렌체 시민들이 단테 탄생 6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65년 단테의 유해를 피렌체로 가져오려 했지만 실패하고 산타 크로체 성당에 가묘를 만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단테에게 추방령을 내린 피렌체 시는 2007년 단테에게 공식 사과를 표하고 그를 사면했다.

하지만 유해는 여전히 라벤나에 있다. 단테는 피렌체에서 태어나 자라고, 베아트리체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토록 그리워했으나 돌아갈 수 없었던 피렌체로 죽어서도 돌아가지 못하는 단테의 운명은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5시인가 6시인가,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종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졌던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시 산 비탈레 쪽으로 발길을 옮겨 ‘1유로’를 내고 음악회 티켓을 구입한 뒤 이른 저녁식사를 마쳤다. 나처럼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음악회를 보러 온 사람들이 성당 앞으로 길게 줄을 서있다. 7시에 음악회가 시작됐다. 남녀로 구성된 아카펠라 합창단이 아름다운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려줬다. 성당에는 전자 음향 시설이 안 되어있지만 건물 자체가 스피커 없이도 골고루 음향이 전파되도록 지어진 것 같았다. 합창단은 중앙 제단뿐 아니라 성당의 후면의 발코니 등에 위치하며 음악을 들려주어 입체적인 음향 효과, 스테레오를 듣는 것 같은 효과를 냈다.

멀리까지 라벤나에 온 것이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회가 끝나자 바로 일어나 역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역에 도착하니 안내 전광판에는 8시 15분 출발 예정인 기차가 30분 지연된다고 알리고 있다. 아무러면 어떤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에서 아름다운 모자이크 보고, 보너스 음악회까지 참석하는 뿌듯한 하루를 보낸터라 바쁠 것도 없고 세상에 부러울 것도 없었다.  

여행의 보너스 같았던 산비탈레 성당의 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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