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토의 최고 걸작
이탈리아의 베니스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방문했을 법한 도시이다. 중세의 분위기를 간직한 물의 도시 베니스는 오래된 건물들과 좁은 골목들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고 낭만적이다. 베니스에 갈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말고 들러야 할 곳이 파도바(Padova)이다. 베니스에서 서쪽으로 40km 지점에 있는 중세의 도시 파도바에는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 조토 디 본도네(1267~1337)가 그린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스크로베니 예배당이 있다. 자그마한 예배당의 내부 벽 전체를 장식한 프레스코화는 서양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인정받는 작품이다. 물론 조토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로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조토는 1267년 피렌체에서 22㎞쯤 떨어진 토스카나의 콜레 디 베스피냐노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농부인 아버지를 따라 양을 돌보던 소년 조토가 어떻게 화가의 길을 걷게 됐는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가 1452년 남긴 글이 조토의 성장기로 인용되곤 한다.
이에 따르면 피렌체 출신의 명망 있는 화가 치마부에가 우연히 바위에 앉아 양을 그리고 있는 어린 조토의 비상함을 발견하고 감명받아 아버지를 설득해 피렌체에 있는 자신의 아틀리에로 데려가 제자로 삼았다. 또 다른 설은 피렌체의 한 양모 상인 밑에서 도제로 있던 조토가 치마부에의 아틀리에를 자주 기웃거리며 그림에 관심을 보이자 치마부에가 그림을 가르쳐 준 덕분에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치마부에의 제자로 조토가 그림을 시작했다. ( 요즘 학자들은 조토가 치마부에의 제자가 아니었고, 다만 작업을 도왔다고 주장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피렌체에 있는 치마부에의 아틀리에에서 도제 생활을 하던 조토는 중부 도시 아시시에서 프란체스코 성인의 삶을 프레스코화로 그리는 스승의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치마부에가 다른 지역으로 작업하러 가느라 아시시를 비운 사이 조토는 자신의 재능을 맘껏 발휘할 수 있었고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는 그의 특별한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게 됐다. 조토가 작업한 아시시의 프레스코화 ‘성 프란체스코의 전설’은 성인의 생애를 시각적으로 설명해 놓은 연작이다.
이 작업을 하면서 조토는 사실적 표현 등 이후 자신 만의 표현법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전통적인 종교적 주제를 다뤘지만 그는 과거의 정형화된 종교화 형식에서 벗어나 인물과 풍경을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그렸고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자연스럽고 사실에 가까운 화법, 즉 현실의 인간을 제대로 다루는 독창성으로 유명해진 조토는 30대 중반이던 1302년 파도바의 거부 엔리코 스크로베니로부터 특별한 작품을 의뢰받는다. 엔리코의 아버지 레지날도 스크로베니는 당시의 교회가 죄악시한 대금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사람이었다. 단테가 ‘신곡’의 지옥편 제 17곡에서 지옥의 불길 속으로 떨어지는 사람으로 묘사했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던 고리대금업자 아버지와 대를 물려받아 대금업을 하는 가문의 죄를 속죄하는 행위로 가족 예배당을 건립하기로 한 것이었다.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집에 예배당을 차리고 화려하게 장식해 저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는지, 그래서 충분히 천국에 갈 자격이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스크로베니는 아예 예배당을 지음으로써 천국행 티켓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화가인 조토에게 내부 장식을 맡긴다. 교회당의 건립은 1303년 시작됐으며 조토는 1304년부터 1305년 사이에 프레스코화를 완성했다. 스크로베니는 1305년 수태고지 축일에 산타마리아 델라 카리타라는 이름으로 성모마리아께 헌당했다.
엔리코가 집안의 예배를 위해 자신의 저택 옆에 지은 예배당은 길이 13m, 폭 8.5m인 직사각형 평면의 소규모 건물이다. 예배당 관람은 미리 예약을 해야 가능하다. 지정된 입장시간 이전에 도착해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입장한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간 순간 푸른빛으로 감싸인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숨이 멎는 듯 했다. 푸른빛은 성스러움을 상징하는 특별한 색깔이다. 청금석을 재료로 만든 안료의 값도 무척 비싸서 성모의 옷 같은 특정한 부분을 채색하는 데 사용했지만 스크로베니의 재력 덕분에 조토는 아낌없이 귀한 푸른색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천정을 비롯해 벽화의 기본 바탕을 모두 푸른빛으로 표현하고 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머금고 떠도는 공기방울마저도 푸른빛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높이 13m의 궁륭형 천장이 있고 직사각형의 긴 벽이 마주하고 있는 단순한 구조의 스크로베니 카펠라(또는 아레나 회당 : 로마의 원형 경기장 자리에 지어진 데서 유래) 는 다른 장식이 없이 온전하게 벽면과 천정에 프레스코화로 가득하다. 동쪽 제단 입구 아치에는 예수를 그린 패널화와 수태고지 장면을 담은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두 장면을 포함해 38개의 구획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성 요아킴과 성 안나의 생애’(남쪽 상단 6장면), ‘마리아의 생애’(북쪽 상단 6장면), '예수의 어린 시절'(남쪽 중간 6장면), '예수의 선교와 기적' (북쪽 중간 6장면), '예수의 수난'(남쪽 하단 6장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북쪽 하단 6장면)이 그려져 있다. 장면 사이사이와 천장에는 예술, 성모자, 구약 시대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조토의 프레스코화가 미술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의 혁신적인 화법 때문이다. 평면적이고 상징적인 이전의 종교화와 달리 조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입체감이 느껴진다. 뿐 만 아니라 인간이 느끼는 기쁨과 슬픔, 분노 등 내적인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성서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배경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도 이전의 비잔틴 회화에서는 없던 화법이다. 예수의 신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은 축소하고 마리아와 부모의 생애, 예수의 어린 시절과 수난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적인 부분을 부각시켜 공감하도록 유도했다.
죽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놓고 비통해하는 순간을 묘사한 ‘애도’는 가장 극적이다. 미술사가들이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그림으로 꼽는 이 작품에서 아들의 죽음을 접한 마리아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에 피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날갯짓하는 천사들도 비통한 표정이고 주변의 성인들도 근엄함을 벗어던지고 인간적인 슬픔을 드러내고 있다. 얼굴과 목에서는 슬픈 감정을 드러내는 깊은 그림자를 볼 수 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 조토의 작품을 르네상스 회화의 출발로 보는 이유다.
출입문이 있는 서쪽 벽 전체는 최후의 심판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건물 입구에 거대한 최후의 심판 장면을 그리고 양쪽 벽에 성서의 이야기를 배치하는 것은 비잔틴 교회 장식의 규칙을 따른 으로 예배당을 나갈 때 다시 한번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이다.
맞은편 서쪽 벽면은 사후세계에 예수님이 심판자로서 천국과 지옥으로 갈 사람들을 나누고 있는 ‘최후의 심판’ 장면이다. 무지개색 후광 속에 앉은 심판자 예수의 발 아래로 그리스도교의 상징인 나무 십자가로 분리해 왼쪽은 구원받는 자들을 그리고 오른쪽에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는 이들을 그려 놓았다. 극명한 대비를 정교하고도 강렬하며 사실적으로 표현해 회개하면 천당이고, 죄를 지으면 지옥행이라는 교훈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십자가 바로 왼쪽에 무릎을 꿇고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 성 카타리나에게 성당을 바치는 스크로베니의 모습이 보인다. 전통에 따라 화가인 조토도 구원받는 사람들에 포함됐다.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흰 모자를 쓴 사람이 조토다.
프레스코화는 마른벽에 안료로 그리는 프레스코 세코(건조한 프레스코 기법)과 안료와 석회를 섞어 젖은 상태에서 그리는 '부온 프레스코' 기법이 있다. 부온 프레스코는 회반죽으로 벽에 초벌칠을 하고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그 위에 밑그림을 그리고 석회수에 안료를 섞은 프레스코 안료로 채색하는 기법이다. 내구성이 좋고 색상이 아름답지만 석회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마쳐야 한다. 조토는 부온 프레스코 기법으로 작업했다. 완성한 후 하루가 지나면 경계선이 나타나기 때문에 작업기간을 추정할 수 있는데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경우 852개의 그림 조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품이 수백 년을 견딘다고 하지만 근처의 폭격과 지진으로 인한 건물의 균열, 내부의 습기와 오염으로 인한 훼손이 심했다. 1978년부터 2년간 실태조사를 거쳐 1985년부터 2001년까지 전면적인 보수작업이 이루어졌다. 오래되고 소중한 작품이라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엄격하게 통제된 상태에서 관람하도록 하고 있다. 예약이 필수이며 제한된 시간 15분에 제한된 인원만 들어갈 수 있다. 가기 힘들고 방문 절차도 까다롭지만 ‘꼭 한번 봐야 할 명작’ 리스트에 올려야 할 인류의 유산이라는데 토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럽 회화의 흐름을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바꿔놓은 '서양회화의 아버지' 조토의 작품은 피렌체에 많이 남아있다. 메디치 가문이 세운 우피치 미술관, 프란체스코회가 지은 산타크로체 성당의 바르디 가족 예배실, 도미니크회가 지은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의 십자가상이 조토의 작품이다. 피렌체 최고의 화가로 대접받았던 말년의 조토가 마지막으로 열정을 쏟았던 작품은 두오모 옆에 있는 종탑이다. 1334년 대성당 주임 건축가로 임명된 조토는 이 탑을 설계하고 짓기 시작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1337년 1월 8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