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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노마드 함혜리 Apr 15. 2020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오늘은 오랜만에 [아트 힐링 트래블] 시리즈를 올려봅니다. 밀라노 두오모의 초청으로 안드레아 보첼리가 부활절 특별 공연 'Music for Hope'라는 제목으로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전 세계에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글을 포스팅했습니다. 내친김에 밀라노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소개합니다. 이 걸작은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에 있습니다. 지금 그곳의 문도 굳게 닫혀 있겠지요. 아침에 지인이 보내온 이미지 중 하나가 최후의 만찬이었는데 예수님이 열두제자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느라 혼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표제 이미지)우크라이나 문화부에서 만든 이미지인데요. ‘웃프다’는게 바로 이런 상황이겠지요. 예수님이 열두제자와 모여 최후의 만찬도 하고, 우리는 여행도 하고 미술관도 갈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글을 올립니다. ##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년)는 과학자, 발명가, 화가, 건축가로서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천재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작품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은 <최후의 만찬>이다.

<최후의 만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장면을 담은 프레스코화다. 밀라노 대성당(두오모)에서 도보로 20 정도 거리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 식당 벽에 그려져 있다. 유네스코는 1980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과 함께  작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모나리자> 함께 다빈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임에도  그림을 실제로 봤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터넷에서 예약을 하거나 일찌감치 일어나 줄을 섰다가 당일 입장권을 받아야   있기 때문이다. 어렵게 입장해도 작품 앞에 머물  있는 시간은 15분으로 정해져 있다. 럼에도 밀라노에 갔다면, 아니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어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도미니크 수도회 성당 옆으로 ‘체나콜로(Cenacolo)’라고 쓰인 곳이 입구다. ‘체나콜로 수도원의 식당, 최후의 만찬을 그린 그림,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을  식당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다.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몸이다라고 하시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성경 마태복음 26)
예수는  만찬을 마친  겟세마네로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곧바로 끌려가게 된다.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눈 것은 가톨릭 교회에서 행하는 영성체 미사의 중요한 의식이 됐고 최후의 만찬 장면은 성모자상, 성가족, 동방박사의 경배 등과 함께 화가들이 중요하게 다루는 성화의 주제가 됐다. 특히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는 단골 소재였다. 식사를 묵상의 연장으로 만든다는 기대에서 ‘최후의 만찬장면을 수도원 식당에 실물 크기로 거대하게 그리곤 했다. 다빈치 외에도 ‘최후의 만찬 소재로 그린 화가들은 많지만 다빈치의 작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작품과 함께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작품이다.
회벽에 유채와 템페라로 그린 작품(세로 460cm, 가로 910cm) 도판을 보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숭고한 주제를 다루는 방식, 면밀하게 연구된 원근법의 표현, 해부학과 골상학에 입각한 인물의 묘사, 색조의 조화, 풍부한 상징성과 생생한 서사, 우아한 선과 동작의 표현  어느 하나 나무랄  없다.
 피렌체에서 멀지 않은 빈치에서 태어난 다빈치는 피렌체를 근거로 활동했지만 에술의 후원자인 로렌초  메디치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다른 화가들에 치여 로마 교황청의 시스티나 예배당 작업에서도 제외되자 밀라노행을 결심한다.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자신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초대받는  성공한다. 공작의  ‘궁정 화가,  공학자라는 직함으로 활동하게 되지만 그렇다  걸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던 다빈치에게 공작은 집안에서 후원하는 수도원이 식당 프레스코화를 주문한다. 다빈치의 나이 마흔셋이던 1495 ,   프레스코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다빈치는 자신의 후원자인 스포르차에게 인정받고 싶어  ‘나는 기적을 행하고 싶다 수없이 공책에 적으며 ‘천재 자존심을  일생일대의 역작을 완성하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다빈치가  프레스코화의 주문을 받은 것은 1495 초부터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마흔셋. 완벽한 ‘최후의 만찬 위해 그는 10년간의 연구와 치밀한 준비를 거쳐 작업 시작 3 만인 1498 작품을 완성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쭈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마태복음 26장)
다빈치가 표현하고자 했던 순간이다. 고정된 이미지의 최후의 만찬보다 더 사실적이고 생생한 작품을 그리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예수와 12제자가 등장하는 그림 안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다빈치의 천재성에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마치 환등기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역동적인 상황의 묘사력이다. 각 등장인물의 몸짓과 손짓, 미묘한 속임수와 암시를 통해 예루살렘의 어느 방에서 펼쳐진 역사적 사건을 절묘하게 표현해냈다.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와 전체 화면의 조형성이었다.
사실적인 현장감을 중요하게 여긴 다빈치는 종교화의 등장인물들이 달고 있는 후광을 걷어내 버렸고 드라마틱하게 구성을 했다. 제자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베드로와 요한, 유다가 화면상 예수의 왼쪽에 있다. 예수의 오른팔과 베드로의 말을 들으려고 기울인 요한의 자세가 삼각형을 이룬다. 자세히 보면 베드로의 손에 칼이 들려 있다. 의심이 많은 베드로가 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은 예수가 체포될 때 로마 병사의 귀를 자를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끼어든 베드로 때문에 몸을 뒤로 젖히고 있는 유다는 오른손에 돈주머니를 쥐고 있다. 예수를 팔고 돈을 받을 것이라는 암시다. 그림 속 유다는 치켜 올라간 눈썹에 매부리코, 기다란 턱에 각진 하악골을 가진 노인으로 표현하고 빵을 집으려고 왼손을 뻗다가 소금통을 엎지르는 것으로 설정했다. 왼손잡이는 두려움과 의심의 대상이라는 부정적인 문화적 연관성을 함축하고 있다. 소금통을 엎는 것은 불길함을 의미한다.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내면을 표현하고자 다빈치는 시장과 궁정, 이웃 마을 등 가리지 않고 다니며 수도 없이 많은 스케치를 그리고 고심했다. 유다가 은전 서른 냥에 예수를 팔았다는 사실에 근거해 그의 사악한 성품이 드러나는 얼굴을 찾기 위해 1년이 넘게 밀라노 외곽의 빈민가 보르게토 마을을 찾았다고 한다.
긴장이 도는 상황인데도 가운데서도 제자 요한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댄 브라운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옆자리에 앉은 이가 사도 요한이 아니라 예수의 숨겨둔 아내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겠느냐는 상상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어디까지나 픽션이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전개였다. 그러나 학자들 대다수는 예수의 옆자리에 앉은 인물이 여성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다빈치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체적 아름다움은 곱슬머리에 이목구비가 여성적인 청년이나 사춘기 소년, 심지어 사춘기 이전의 소년이었다는 이유에서다. 예수의 얼굴은 누구를 모델로 했을까. 그의 공책에는 예수의 모델로 고려했음직한 사람들의 이름이 몇 개 적혀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다빈치는 예수의 머리를 중심으로 정확한 계산에 의한 원근법의 공간을 만들었다. 제자들을 각각 세 명씩 네 무리로 나눠 예수를 중앙으로 각각 두 무리씩 배치해 대칭을 이루게 했다. 그림의 배경에는 세 개의 창이 나 있는데 이것을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특히 중앙의 창은 예수의 상반신을 감싸는 후광효과를 절묘하게 낸다.
다빈치는 수도원 식당이 확장돼 보이도록 중앙 투시도법을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다. 화면 안쪽으로 후퇴하는 천장과 측벽의 선들이 모두 중앙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의 머리로 집중하면서 인물을 강조했다. 천장의 바둑판무늬는 관람자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축소돼 화면의 공간감과 입체감을 생생하게 부각한다.
그럼에도 완벽한 이 그림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다빈치는 작품을 그릴 때에 작품의 수정이 가능하고 색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템페라와 기름을 섞어 쓰는 실험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그림은 생동감이 넘치고 인간적인 표현이 가능해졌지만 식당의 습기 때문에 안료가 쉽게 벗겨져 버려 원형을 거의 잃었다.
이 작품은 500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며 수차례 파괴와 손상을 겪었다. 심하게 손상된 작품은 수차례 복원을 거쳤다. 손을 안 보느니만 못한 복원이 대부분이었다. 마지막 복원은 1978년부터 1999년까지 21년간 이뤄졌다. 워낙 손상이 심해서 원래 색깔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던 것을 후배 화가가 당시 작품이 완성된 직후에 베껴 그린 그림이 온전히 남아 있어 이를 기준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로도비코의 통치는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 이듬해인 1499년 프랑스의 밀라노 침공으로 막을 내리고 궁정은 해산됐다.  다빈치의 말년은 어땠을까. 피렌체로 돌아가 숨죽이고 있던 그에게 프랑스에도 이탈리아와 같은 아름다운 예술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손을 내밀었다.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프랑스의 루아르 지역에 클로 뤼세라는 아름다운 성과 많은 연금을 제공하며 그를 초대했다. 자신을 인정해 주는 군주를 찾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프랑스로 건너 갔다. 그리고 3년간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1519년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는 천재 화가를 인정해 준 군주 프랑수아 1세의 품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습을 '다빈치의 임종을 바라보는 프랑수아  1세'라는 작품으로 남겼다. 그의 임종에 관해선 르네상스 시대 화가이자 건축가, 저술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예술가 열전'에 이와 비슷하게  언급하고 있다.

끝까지 자신을 지켜준 왕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그가 지니고 있던 <모나리자>를 왕에게 선물했다. 다빈치의 작품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 피렌체 우피치미술관의 <수태고지>를 비롯해 20여 점 정도 남아 있다.

<수태고지>는 1867년 우피치에 소장되기 전에 몬테 올리베토 수도원에 걸려있었고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다. 일부 평론가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승인 베로키오의 작품이라고 했지만 존 러스킨은 레오나르도의 초기작품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의문은 1907년 풀렸다. 천사 가브리엘의 소매를 그리기 위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습작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수태고지>가 레오나르도가 20대에 접어든 1470~3년 경 그린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2019년은 다빈치가 세상을 떠난 지 꼭 500년이 되는 해였다. 전 세계에서 이를 기념해 많은 기획전시가 열렸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참관차 갔다가 베니스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열린 레오나르도다빈치 특별전을  볼 수 있었다. 그 유명한 '비트루비우스적 인체 비례' 드로잉을 비롯해 많은 드로잉을 볼 수 있었다.  '비트루비우스적 인체 비례'는 친구 루카 파치올리를 위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빈치는 인체의 기하를 우주의 완전함에 적용했다.  원형인 우주 안에 네모인 대지가 들어가고 팔과 다리를 폈을 때  네모의  형태에 꼭 맞는 것이  이상적인 인간이며, 그것이 곧  우주와 일체화된 소우주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고향 빈치에도 다녀왔다. 다빈치 박물관이 볼거리의 전부인 작은 마을이었는데 박물관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이 모나리자의 배경에 담긴 풍경화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혼외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직관이 뛰어나고 노력형이었다. 그에게는 자연이 곧 스승이었다. 문학, 철학, 예술 모두가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으며 관찰하고 관찰했다. 어떻게 하면 잘 그려낼 수 있을지를 연구했다. 윤곽선 없이 점으로 표현하는 스푸마토 기법도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자연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법이다.  인체 해부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인물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천재는 500년전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예술은 영원히 남아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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