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바티칸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 시스티나 예배당은 교황의 선거와 추기경단에 의한 미사 등이 이뤄지는 중요한 곳이다. 영화 ‘두 교황’을 통해 실제 어떤 분위기일지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예배당 건축을 추진한 식스투스 4세의 이름에서 예배당의 이름을 따왔다. 반원형의 천장이 덮인 직사각형의 공간은 1477년부터 1483년 완성됐다. 이곳 천장에 미켈란젤로(1475~1564)의 그 유명한 ‘천지창조’가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1508년부터 1512년까지 약 4년간 800㎡ 넓이의 공간에 성서의 이야기를 그려 넣었다.
조각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미켈란젤로에게 프레스코화 작업을 맡긴 이는 교황 율리우스 2세였다. 야심만만한 율리우스에게 미켈란젤로를 추천한 이는 광장의 건설 책임을 맡았던 브라만테였다.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부러워하며 은근 질투심을 품고 있었던 브라만테는 조각을 잘하는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주문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입지는 더욱 굳어질 것이라는 속셈으로 미켈란젤로를 추천한 것이었다고 호사가들은 얘기한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불후의 걸작을 남기는 역할을 했다.
율리우스 2세 치세동안 미술분야에 중요한 업적들이 이뤄졌는데 이는 ‘로마를 기독교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고 힘과 위엄을 부활시키겠다’는 그의 결의 덕분이다. 과도한 재정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아 혹세무민했다는 등 가톨릭교회가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미술사적을 보면 1503년부터 1513년에 이르는 10년간은 로마를 중심으로 한 후기 르네상스 전성기이기도 하다.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기념 건축물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율리우스 2세는 교황권의 권력을 시각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바티칸 궁전을 대규모로 확장한다.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의 위대함을 대대손손 후세에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무덤을 선례가 없을 정도로 장대하게 꾸미기로 한다. 1505년 그는 자신의 무덤을 설계하고 조각해 달라고 미켈란젤로에게 주문했다. 미켈란젤로는 무덤을 장식할 조각들을 구상하고 작업에 들어가지만 융통할 자금이 부족해 주문을 취소하는 대신 자신의 삼촌이 만든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다시 그리기로 결정한다. 브라만테의 추천도 있던터라 미켈란젤로에게 작업을 주기로 한다.
미켈란젤로가 작업을 시작하기 전 시스티나 성당의 궁륭은 천국을 상징하는 푸른색 바탕에 금빛 별이 그려져 있었다. 율리우스 2세는 이보다 더 웅장한 천지창조의 내용을 담고 싶다면서 1508년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조각가로 훈련받고 작업해 온 그에게 그림을 주문한 것은 이례적인 결정이었지만 율리우스의 결정은 서양 미술사에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회화 작업은 미켈란젤로에게 큰 도전이었다. 그는 수많은 드로잉과 습작을 통해 각 인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전체적인 구성의 조화를 소홀히 하지 않은 걸작을 완성했다. 천정화에 매달리느라 목과 피부에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존심과 도전심, 무엇보다도 신을 향한 진지한 마음으로 전력을 다했다. 미켈란젤로가 저간의 사정을 몰랐을리 없지만 그는 작가적 자존심과 신앙심을 걸고 열정을 쏟아 부었다. 인류가 남긴 걸작 중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을 이렇게 탄생했다. ( 율리우스 가문의 상징인 떡갈나무를 곳곳에 그려 넣어 율리우스 2세가 주문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
로마 여행을 해도 시스티나 성당을 찾아 천지창조를 보는 것은 운대가 맞아야 한다. 처음엔 수리 중이어서 못 들어갔고 두번째 방문시 겨우 그 감동을 맛볼 수 있었다.
시스티나 성당의 회랑은 장방형이다. 한눈에 천장을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함이 숨을 멎게 한다. 천장화는 수평의 긴 띠로 나뉘는데 오른쪽에 그리스도의 생애, 왼쪽에 모세의 생애를 길게 펼쳐 그렸다. 천장은 밋밋한 평면을 세모와 반원, 직사각형 등 기하학적 공간으로 나누고 실제 장식과 그림을 섞어가며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그리고 환상적으로 공간을 채웠다. 창문 위쪽의 세모 공간에 예수의 선조들이 등장하고 그 위로 무녀와 선지자들이 보인다. (기독교 교회는 아폴로 신의 예언자이자 사제인 델포이의 무녀를 이용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했다. ) 천장의 네 모퉁이 오목한 원안에는 구약의 장면을, 그리고 천장의 중앙에 나체 인물들이 모서리를 장식한 아홉 개의 직사각형 안에는 창세기의 장면들을 그렸다.
‘빛과 어둠의 분리’,‘해와 달과 땅의 창조’,‘물과 땅의 분리’로 이어지는 거대한 작품의 중심, 즉 네 번째가 그 유명한 ‘아담의 창조’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닮은 아담에 손가락을 뻗어 생명을 불어넣어주려 한다. 아담의 손가락이 하나님의 손가락을 향한다. 양쪽의 눈빛이 강한 의지로 소통하는 극적인 순간이다. 그러나 손가락은 불과 몇 ㎝ 떨어진 상태에서 닿지 않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상상력의 무한함을 보여주고, 관람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시간의 정지다. 그 옆으로 이브의 탄생, 낙원 추방, 노아의 방주 등 이야기가 펼쳐진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화를 완성하고 나서 24년 후 교황 바오로 3세는 예배당 제단 뒤의 벽화를 주문했다. 후기 르네상스 양식이라 불리는 매너리즘의 절정을 보여주는 ‘최후의 심판’(1541년)이다. 예술수를 중심으로 천국- 연옥-지옥을 그린 '최후의 심판'이 공개되자 압도적인 스케일과 사실적인 묘사로 경탄을 자아냈지만 한편으론 등장인물들을 적나라한 나체로 그려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며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거센 비판을 받았다. 한 가운데에 오른 팔을 높이 든 건강한 체격에 반나체인 예수, 그 왼쪽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마리아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천사의 역할을 나체의 성인 남자들이 그려져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의 12제자 중 한명인 성인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인육 껍질의 얼굴부분에 늙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의로운 영혼들이지만 유명한 성자나 교황, 독지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는 미켈란젤로가 청년시절 작업한 또 다른 걸작 '피에타'가 있다. 1498~1499년 작업한 이 조각은 미켈란젤로의 긴 경력에서 초기 작품에 속한다. 젊은 마리아의 얼굴 표정과 손의 동작, 드레이프 등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마감과 심리적 해석으로 작품 완성 이래 칭송이 자자했다. 파손의 위기를 겪은 뒤 지금은 방탄유리 속에 놓여 있지만 걸작의 아우라를 느끼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