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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노마드 함혜리 Dec 14. 2020

빛과 색채의 화가 티치아노

베네치아 르네상스 거장을 찾아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이끈 거장 티치아노

서양 미술사에서 16세기 중엽의 베네치아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5세기 피렌체, 16세기 초의 로마에서 만개했던 르네상스 회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베네치아만의 회화 양식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기 때문이다.

어둠과 대조를 이루는 신비로운 빛의 표현, 보색 대비가 뚜렷한 색채, 자연스러운 붓 터치, 개성 넘치는 과감한 구도가 베네치아 화풍의 특색이다. 이런 화풍이 만들어진 것은 베네치아라는 도시의 특성이 작용했다.

당시 동방과 유럽 무역의 거점 역할을 했던 베네치아에서 화가들은 좋은 유화 물감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유화는 북유럽 화가들에 의해 기법이 개발된 유화는 덧칠과 질감을 통해 훨씬 사실적인 표현을 할 수 있다. 항구도시 베네치아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아마포에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려보니 아주 효과가 좋았다.  캔버스에 유화 작업은 베니스 화가들의 발명품이다.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부유하고 강한 권력을 가진 상인 가문이 정부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최대한 빛을 누릴 수 있도록 대운하에 면해 대저택을 지었다. 창문은 부의 상징이었다. 겉치장뿐 아니라 내부의 장식도 경쟁을 했고 화가들의 작업실이 번창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선전도구로서 미술이 가지는 힘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운하에 면해서 화려한 저택을 짓고 집에는 유명 화가에게 그림을 주문해서 걸었다.

베네치아 화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베첼리오 티치아노(1485년경~1576년)다. 완벽한 기교를 바탕으로 빛과 색채를 능숙하게 사용하며 색채 미술의 진수를 선사했던 티치아노는 99살의 나이에 흑사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인기와 명성을 누린 복 많은 화가였다.

베네치아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의 산골 마을 피에베 디 카도레에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500년 경 고향을 떠나 베네치아로 갔다. 모자이크 장인 세바스티아노 주카토의 공방에서 회화 수업을 시작한 그는 당대 베네치아 회화를 이끌던 젠틸레 벨리니의 공방을 거쳐 지오반니 벨리니의 도제가 된다. 색채와 빛을 사용하며 화면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화풍을 자랑했던 벨리니의 공방에서는 거장 두 명을 배출하는데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였다.

조르조네는 예술사상 가장 훌륭한 작품의 하나로 꼽히는 ‘폭풍’(1508년 경,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이라는 유명한 작품을 남긴 화가다.  '폭풍'은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번개가 치기 시작하는 가운데 벌거벗은 채 아기를 안고 들판에 앉아 있는 여인을 목동이 바라보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해석에 대해 여러 가지 이론이 있을 정도로 신비함을 지닌 작품이다. 특출한 재능을 지닌 화가 조르조네는 유화를 가지고 다양한 실험을 했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잘 나가는 화가 벨리니 보다 부드러움을 표현하며 훨씬 사실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한 표현을 담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러나 조르조네는 1510년 베네치아를 덮친 전염병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티치아노는 선배 조르조네의  혁신적인 화법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빛과 색채의 마술사

티치아노는 1514년 베네치아에 자신의 작업장을 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야심작이자 그의 이름을 알린 그림은 산타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의 제단화 ‘성모승천’(1518)이다. 높이 7m에 가까운 화면을 승천하는 성모를 중심으로 지상에는 성모승천의 증인이 된  사도들, 하늘에는 성모를 맞이하는 성부를 그렸다. 베네치아 최대의 제단화로 전체 화면은 성모의 등 뒤에서 쏟아지는 빛과 세 부분에서 골고루 보이는 붉은색으로 통일감을 이룬다. 전통적인 구도의 모든 규칙을 깬 이 작품은 당시 사람들에게 가히 충격이었다. 뛰어난 색채 사용을 보여준 이 작품으로 티치아노의 명성은 단번에 절정에 달했고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우뚝 섰다. 베네치아를 몇 차례 갔지만 티치아노의 걸작이 있는 이 성당을 찾은 것은 한참 만의 일이었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열리는 자르디니 공원과 몇몇 유명 전시장, 산마르코 광장 주변만 맴돌다 가곤 했다.

산타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은 운하와 다리로 이뤄진 베네치아의 크지 않은 갈림길에 위치해 자칫 놓치기 쉽다. 광장이라고 하기엔 좀 좁은 곳에 위치한 고색창연한 성당을 찾기에 좋은 시간은 이른 아침이다. 베네치아의 다른 많은 곳들처럼 길을 잃기 일쑤여서 물어 가며 일부러 찾아야 찾을 수 있지만 어렵게 찾은 만큼 감동이 클 것이다.

성당에 들어서면 복도 끝으로 빛이 쏟아지면서 붉은 옷을 입은 성모가 실제 승천하는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 작품을 탐낸 나폴레옹은 점령군으로 와서 떼어갔다가 후에 돌려받았고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초상화의 대가        

종교화, 역사화, 초상화, 고전 신화화, 여성 누드까지 매우 다양한 주제를 다뤘던 그가 당대에 특히 큰 명성을 얻은 것은 초상화 때문이었다. 티치아노는 종이에 예비 드로잉을 하지 않고 캔버스에 직접 간략한 스케치만 하고 곧바로 붓질을 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힘들이지 않고 붓질 몇 번 만으로 그린 듯 자연스럽고, 신비한 눈빛이 마치 살아있는 듯 한 초상화는 베네치아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명성이 높았다.

그의 고객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였다. 쌍두 독수리의 문장 아래 유럽의 절반을 통치한 최고의 권력자는 어느 날 페데리코 2세 곤차가(1500~1540)의 만토바 궁정을 방문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도 문화와 예술에서 가장 앞섰던 만토바 공국의 궁정에서 티치아노가 그린 곤차가의 초상화를 보고 바로 그를 자신의 궁정화가로 임명했다.

왕의 초상화가

머리에 써야 할 왕관이 무려 17개나 됐지만 그 많은 나라를 직접 통치할 수 없었던 카를 5세에게는 그가 없는 자리에서 자신의 권리를 대신할 초상화가 매우 중요했다. 티치아노는 카를 5세를 위해 고요하고 위엄이 넘치며, 때로는 인간적인, 그리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특징인 주걱턱이 두드러지지 않는 멋진 초상화를 그렸다. 관대하면서도 의례적이지 않은 황제의 모습을 그린 ‘개와 함께 있는 카를 5세’(1532)를 보고 너무나 흡족했던 카를 5세는 티치아노에게 황금 박차의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1648년 티치아노의 전기를 쓴 리돌피에 따르면 황제의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가 떨어뜨린 붓을 카를 5세가 주워 건네며 “티치아노는 황제의 시중을 받을 가치가 있다”라고 했을 정도로 화가를 존중했다고 한다.

티치아노가 그린 카를 5세 초상화의 대표작은 ‘카를 5세 기마상’(1548, 프라도 미술관)이다. 뮐베르크에서 개신교 제후들의 슈말 칼 텐 동맹군을 제압한 황제가 말 위에서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있는 작품이다. 붉은(티치아노의 레드) 색 황혼을 배경으로 이상적인 가톨릭의 기사이자 고대 로마 황제의 계승자, 고결한 승리자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통치자 기마 초상의 모범이 됐다. 전 유럽의 군주들이 앞 다퉈 그에게 초상화를 주문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티치아노는 작업은 주로 베네치아에서 했지만 그 활동범위가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국제적 화가였다.

관능적인 누드화의 원조

기독교 제국의 통일을 위해 온갖 시도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카를 5세는 1555년 제국을 분할해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과 네덜란드 왕위를 물려주었다. 펠리페 2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가의 후원자가 됐다. 티치아노는 펠리페 2세를 위해 10여 년에 걸쳐 6점의 신화 주제 그림들을 완성해 스페인으로 보냈다. ‘포에지’라고 이름 붙인 이 걸작 시리즈는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서 이야기를 발췌하고 이를 회화 이미지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야기의 정수를 포착해 뛰어나게 묘사하는 기량과 풍부한 창의력, 조화롭고 시적인 티치아노의 작품은 후대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티치아노가 개척한 분야 중 여성 누드도 빼놓을 수 업다. 그의 종교화가 장대하고 기념비적인 색채가 강했던 반면 여성을 그릴 때는 좀 더 세속적이고 은밀한 아름다움을 살리는데 공을 들였다. 여성 누드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 우피치 미술관)다.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의 뒤를 이어 티치아노의 후원자가 된 그의 아들 귀도 발도 델라 로베레가 1534년 줄리아 바라노와의 결혼을 기념해 주문한 것이다. 이 작품은 벨리니 공방에서 함께 수업받았던 선배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1510년 경, 베를린 국립 회화관)를 참고한 것으로 알려진다. 비슷한 구도로 여성의 누드를 그렸지만 내용은 사뭇 다르다. 조르조네의 비너스가 풍경 속에 비스듬히 누워 눈을 감고 있는 반면 티치아노의 비너스는 귀족의 저택에서 화려한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다. 이 또한 파격이었다. 티치아노의 비너스가 던지는 도발적인 시선은 훗날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마네의 ‘올랭피아’ 같은 문제적 작품들이 탄생하게 독려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조각 같은 몸매뿐 아니라 도자기처럼 매끈한 피부가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빛에 따른 색채의 변화를 잡아내는데 탁월했던 티치아노가 이런 기교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림의 재료로 유화를 택했기 때문이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 ( 티치아노, 우피치 미술관). 티치아노는 여성의 누드를 그릴 때는 좀 더 세속적이며 은밀한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붓질로 그림의 느낌과 질감을 살리고 덧칠로 수정이 얼마든지 가능한 유화는 15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발명했지만 유화를 좀 더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것은 베네치아 화가들이었다.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당시 가장 번성한 무역항이라는 이점 때문에 수월하게 최고급 안료를 구할 수 있었다. 이들은 패널에 유화물감을 사용하던 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돛을 만드는 튼튼한 캔버스를 소재로 도입해 큰 화면에 운반이 용이하고, 붓질을 더욱 쉽게 할 수 있도록 했다. 티치아노가 그 선두에 있었다. 그는 캔버스에 유화로 작업하며 그 표현적인 가능성을 실험하고 가능성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캔버스에 유채’로 작업하는 오늘날의 회화는 티치아노에서 비롯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니 서양미술사에서 티치아노만큼 중요한 인물이 또 있을까. 베네치아 회화의 황금기를 이끈 거장 티치아노는 말년까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1576년 페스트로 사망한 그는 자신이 그린 걸작 ‘성모승천’이 있는 산타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에 잠들어있다.  


16세기 베네치아 미술계를 대표하는 티치아노. 그는 빛과 색채를 완숙하게 사용하며 종교화, 초상화부터 여성의 누드까지 다양한 주제의 걸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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