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론> 중 나를 깨우는 한 문장
' 한 번 몸을 받고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소진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공연히 서로 죽이고 해치며 사는 삶이 마치 말이 달리는 것 같으니 이 또한 슬프지 않은가? 일생을 고생만 하고도 잘 된 것은 보지 못하고, 돌아가 쉴 곳을 알지 못하면 이 또한 슬프지 않은가? (..) 몸이 가면 마음도 따라 사라지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큰 슬픔이 아닌가? 사람의 삶이란 본디 이렇게 어두운 것인가, 아니면 나만 홀로 어두운 것인가? 안 그런 사람도 있는 것일까?'
- 장자, < 제물론>
장자는 기원전 4세기에 송나라에서 뽕나무 밭지기를 하며 은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쟁과 탐욕의 시대였던 만큼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소박한 삶에 만족하며 살았다. 출세하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지 않아 재상 자리도 거절했다고 한다. 장자는 여러 가지 은유를 통해 욕망을 좇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면서 무위의 삶을 노래했다. <제물론>은 '장자'의 여러 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난해한 부분으로 꼽힌다. 그 유명한 장자의 나비도 제물론 6장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런 초연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지 참 궁금했는데 제물론을 보다가 무릎을 쳤다. 장자는 삶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인간 본연의 한계에 대해 처절한 통찰을 거쳤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위의 대목을 보면 장자는 인간의 삶은 고달픈 것이고, 또한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므로 인생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이라고 가슴을 쳤다. 그러면서 나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 묻는다. 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장자가 살았던 고대적 사유의 시기에 서양에서도 많은 고대 철학자들이 인간 존재의 한계를 인식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고 믿은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근대 철학에서 인간의 존재와 한계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근대적 사유의 핵심은 '나'에 대한 인식이다.
코로나 19로 고립되어 지내다 보면 '나만 이렇게 도태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몰려올 때가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며, 이런 상태가 특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 장자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나! )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어리석어 보이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짐으로써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장자는 '호접몽'에서 보듯이 '나'를 객관화하고 대상화함으로써 인생의 유한함에 대한 불안감과 허무감에서 벗어났다. 장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크나 큰, 진정한 자유는 처절한 통찰을 거쳐 나온 것이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고려 중기의 보조국사 지눌은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因地而倒 因地而起)'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새로운 수행의 기풍을 진작하려는 의미로 쓴 '권수정혜결사문' 첫 문장에 나오는 것인데 원래 이 말은 중국의 야보도천이 <금강경>을 해설하면서 쓴 문장이다. 보조국사는 이 말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은 마음에서 나왔으니 마음을 닦으면 모두 깨달은 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을 전하고자 했다. 비단 수행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일러준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풀어야 한다. 좌절하지 말고 절망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줄 수 없으니 내가 스스로 해야 한다. 별들에게 물어보라. 밤 하늘에 홀로 빛나는 것이 외롭지 않느냐고. 별은 답할 것이다. '외롭다. 외롭기에 찬란한 것 아닌가? 그러나 주위를 보라. 나말고도 수많은 별들이 있지 않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