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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유진 Jan 04. 2025

꽃도 말라죽이는 부정의 힘

타고난 부정

은재는

간혹

친구들과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때마다 줄곧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착한 사람하고는 친구 못 해.


은재가 그렇게 말하면

친구들은 대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는?"이라고 묻는다.


하지만

은재는 말을 번복하지 않는다.


은재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까.


은재는 정말 착한 사람 하고는 쉽게,

아니, 아예 친구를 하기 힘들었다.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



여기서 '착한 사람'을 은재가 어떻게 정의했는지

꼭 집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착하다는 것은 때론 무척 모호하니까)


은재가 말하는 '착한 사람'은

온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사람,

당신의 모든 세상이 포근하고 말랑한 것들로 채워져 있는 사람을 뜻한다.


문학적인 표현을 제하고 말하자면

무한적으로 긍정적인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은재는 그런 사람하고는 친구가 되기 힘들었다.

그 무한적인 긍정성에 피가 말린다고 해야 하나.

애초에 가진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랬다.


물론 그렇다고

은재의 친구 중 그런 친구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생 때 있었다.

자기 주변뿐 아니라 온 세상이 마시멜로우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정말 본성이 순했다.

욕도 제대로 못 했다.

오히려 욕을 하면 웃겼다.

욕뿐만 아니라 그냥 나쁜 말을 하면 웃겼는데,

그만큼 그 친구는

선한 말만 했다.

그리고 그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 노란색이었는데,

그것마저 친구와 썩 어울려서

억지로 착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만큼 긍정적인 친구와

같은 반인 은재는 줄곧 잘 지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은재는 항상 의문이었다.


왜 우리가 친구지?


물론 그 의문에 답을 하듯

지금은 친구가 아니긴 하지만,

그것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은재는 오래 전부터 자신이 부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은재는 부정적이다.


그 문장은 참이었다.

거짓이 없었다.

은재는 부정적인 게 맞았다.


은재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남들이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남들에 대해 반감이 있었다.

남들은 은재가 무슨 행동을 해도

은재를 싫어할 것이라고,

때론 남들이 일부러

은재를 주눅들게 하려는 것이라 생각해서

'사람'에 대해 거부감을 표현했다.


흔히 말해 싸가지 없게 행동했다.


그래서

초등학생 때부터 은재의 인간관계엔

탈이 많았다.


대체로 이런 은재의 자기 방어를

친구들이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착각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서 그런지

첫 인상이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매번 바닥을 보며 걷는 이유도

위와 같았다.


그리고

그것의 연장선상으로

은재는 한 번도 고백해본 적이 없었다.

그 사람이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고백을 해도 승산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참은 적이 많았다.


물론 은재도 알았다.

부정적인 생각은

쉽게 실패를 떠올리고,

실패를 떠올리면

대체로 불안해진다.

그리고 그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실패하고

몇 번 실패한 사람은 더 자주 실패를 하게 되며,

그건 또 다른 부정성을 만든다.


그래,

은재도 알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은재에게

부정적인 사람이 실패를 예상하는 본능을 이용해

보완할 점을 찾으면

그 보완을 통해서 더 성공적인 성공을 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경우는

긍정적 유전자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나 가능하지

은재처럼

온몸의 유전자가 부정적인 사람은 불가능하다.


봐,

지금도 무턱대고 불가능하다고 하잖아.


그리고 긍정적 유전자,

부정적 유전자, 라고 말한 것과 같이

은재는 자신의 부정성이 유전이라고 생각했다.


은재의 엄마가,

은재의 할머니가 상당히 부정적인 사람이니까.


은재의 엄마는 말 끝마다 혀를 찬다.

혀를 찬다는 것은

기가 차다는 것이고

그건 상대의 무언가를 낮잡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재의 할머니는

안 된다,

못 한다, 를 입에 달고 사는 분이다.

그게 불안 때문인지

권태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면

3대 째 내려온 부정성이

날로 깊어지면서

우울증이 된 걸까?


그리고

날카로운 부정성과 파도 같은 우울증이 만나

부정성이 조금 무뎌지면서

무기력을 탄생시키고

그래서 지금 은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까?


사실 그렇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은재의 부정성은

은재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뭘 하려고 해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우울을,

푸름을 만나

엄마처럼 그들에게 혀를 차지도 못하고,

또 외할머니처럼 누군가를 시키지도 못하고,

그대로

K.O.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행위에 자신감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 모든 행위에.

그래서 시도는 무슨 계획도 잡지 못했다.


지금의 애인은

은재의 이런 점을 무척 혼내곤 하는데,

아빠도 저번에

은재에게

너무 자신감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는

무턱대고 긍정적이면

뭐라도 이루어질지어니, 라고 말한다.


하지만

은재는

어디서 어떻게

긍정적이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시하자니

은재 스스로도 자신의 부정성으로 인해

아무 도전도 하지 않는 자신이

안쓰러웠다.


그러니

오늘부로

연구를 해보고자 한다.

조금은 세상을 마시멜로우로 볼 수 있는 방법을.


그러고 나서도

성공이나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면

그때 다시 부정적인 은재로 살아보자고.


그러니

오늘도 온 투고 거절 메일을

"얼마나 엄청난 데뷔를 하려고"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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