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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Oct 21. 2023

통금의 이유

저는 엄마의 대리인이 아니잖아요

나는 대학생 때 대략 10시 반까지 들어가야 하는 통금시간이 있었다. 통금시간뿐만이 아니라, 엄마는 쓸데없이 늦게까지 밖에 있으면서 돈 쓰지 말고 일찍 일찍 다니라고 하시기도 했다.


나는 딱히 음주가무를 즐기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안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어떨 때는 책을 읽느라 밤늦게까지 학교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날도 많았지만 또 어떨 때는 동기나 선배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답답한 마음 때문에 밤늦게까지 술을 들이키는 날도 있었다.


이미지출처: <술꾼도시여자들>


그러다 어떤 날엔 텐션과 티키타카, 가치관, 삶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 등 결이 너무 잘 맞는 친구들이랑은 정말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지만, 어떤 날은 술을 마시던 도중 어떤 포인트에서 갑자기 '내가 지금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싶은 생각이 들면(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지만) 말도 안 되게 일찍 자리를 빠져나와 집에 가서 책을 읽고 글을 썼던 날도 있었다.  


이미지출처 : <치즈 인 더 트랩>


밤늦게까지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들은 내가 술 먹고 노는 걸 좋아한다고 추억할 것이고, 갑자기 술 먹다 일어나서 가버린 날 함께 있었던 친구들은 내가 글 쓰는 것에 미친 사람인 것으로 기억할 것이다. 앞 상황의 나와 뒤 상황 의 나 중 어느 게 더 진짜 나에 가깝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 두 개의 나 중 어느 것의 비율이 더 높은지도 모르겠다.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먹던 나와, 글을 써야 한다고 정색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던 나 모두 나의 모습이다.


아무튼 엄마가 정해준 통금시간은 언젠가부터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12시까지 술을 마실 때도 있었다. 드물긴 하지만 1년에 1-2번 정도는 새벽까지 술을 먹고 다음날 들어갈 때도 있었다.


처음엔 엄마의 말대로 꼬박꼬박 통금시간을 지켰다. 통금시간을 지킨다는 느낌도 없었다. 나는 대학 수업이 마치면 별일 없는 한 5시-6시쯤 집에 들어가곤 했다. 수업 마치고 3시밖에 안 되었는데 집에 들어갈 때도 있었다. 내가 집에 들어온 뒤, 1-2시간 뒤 엄마가 들어오시곤 했는데 그때부터 잔소리 폭격이 시작되었다.

집에 들어왔으면 청소기도 좀 돌리고, 빨래가 있으면 빨래도 좀 돌리고, 설거지가 있으면 좀 하고, 그걸 일일이 다 말해야 하냐고 귀에 피가 나도록 잔소리를 하셨으니까. 물론 나도 처음엔 했다. 청소기 돌리고, 빨래 돌리고, 설거지하고 하는 거.




저 자질구레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일들이 엄청 싫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게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집안일을 한 만큼, 엄마가 해야 할 일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면 뿌듯하기도 해서 되도록이면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뿌듯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마 2년 남짓이었던 것 같다. 이 기간이 긴 것인지, 짧은 것인지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제시간에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동생이 대학을 입학면서부터 집에 일찍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엄마는 집에 있으면, 동생 밥을 좀 차려 먹이라고 했다.


그전까지는 그럭저럭 할 만했다. 청소, 빨래, 설거지까지는. 하지만 요리는 아예 다른 영역이었다.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해먹이라는데 엄마가 채워놓은 냉장고는 뭐가 많긴 많은데, 먹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장 볼 돈을 주시는 것도 아니었다.  


대충 그때부터 통금을 무시하고 늦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엄마가 잔소리를 하긴 했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가 통금을 지켜 들어가고 집안일을 해놓았을 때 엄마의 사랑을 받고 엄마가 기특하게 생각해 주셨더라면, 아마도 그 인정받는 느낌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꾸역꾸역 계속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통금을 지켜 일찍 들어가면, 나는 가사도우미처럼 청소와 빨래를 하고 동생 밥을 챙겨야 했고 화장실이 더러우면 화장실 청소까지 해야 했다(그렇다고 항상 했다는 건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칭찬을 받거나 용돈을 받거나 기특하게 생각해 주시거나 하는 것도 전혀 없다 보니 나는 되도록이면 일찍 들어가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잡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과제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수업 후 일과를 만들어 집에 들어가는 시간을 늦게 만드는 루틴을 만들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나에게 부과되는 가사일들이 싫어서. 특히 동생 밥 차려 먹이기 싫어서.


그렇게 집안일(특히 동생 밥 차리는 일)을 피해 늦게 집에 들어오는 날들이 이어졌다(이렇게 동생 밥 차리기를 싫어했던 걸 보니, 비혼이라 결혼 가능성도 제로에 가깝지만 만약에 한다 쳐도 남편 밥 안 차려줄 것 같다). 어느 날 술을 먹고 들어와서 화장실에서 씻고 나왔는데 엄마가 기다렸다는 듯 나오자마자 등짝을 세게 갈겼다. 일찍 일찍 들어와서 동생 밥 좀 챙겨 먹이라는데 어디서 맨날 그렇게 술을 처먹고 다니느냐고.


나는 갑자기 분노가 확 차올랐다. 맨날 술 먹느라 늦게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비 받은 걸로 엄마 선물 사드린 적도 몇 번 있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늦게 들어간 날도 있었고. 그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싶은 생각이 들다가 갑자기 서운한 감정이 확 올라왔다.




부모님은 남동생에게는 예체능을 한다는 이유로 몇 년 동안 매달 100만 원 가까운 학원비를 지원해 주셨었는데, 나는 인문계 공부를 하니까 알아서 공부하라며 학원비를 제대로 지원해주시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이 좀 있었다. 매년 학기 초 한두 달 정도 학원을 보내주시긴 했으니 전혀 안 해주셨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겨우 학원에 적응해서 습관이 잡히고 친구들이랑 정보도 주고받기 시작할 때쯤에 '공부하는 방법'을 한두 달 배웠으면 이제부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며 학원을 보내주지 않았다.


나는 이제 겨우 공부 귀가 트이는 것 같은데 학원을 끊는 게 너무 말도 안 되는 것 같아서 계속 다니게 해 달라며 떼를 썼지만 부모님은 확고부동했다. 우리 집안 형편에 그 정도 보내줬으면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첫째가 돼서 철없이 학원 타령 해야겠냐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정도로 집에 여유가 없지는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동생의 예체능을 위한 학원에 매달 100만 원씩 쓰고 있었으니까. 그에 비하면 내가 다니던 학원의 비용은 동생 학원비의 1/5 정도였다.

 

그동안 학원에서 제공해 주던 입시 정보 같은 게 있었고 그 정보들을 친구들과 공유하며 진로를 준비하며 함께 목표의식을 공유하는 그런 부분들도 있었는데, 내가 학원을 끊게 되자 그때부터 입시 정보를 공유받을 수가 없었다. 학원 친구들과도 멀어지며 서먹서먹해졌다. 소외감도 소외감이지만, 무엇보다 내가 느꼈던 건 무력감이었다. 내가 그렇게 졸랐는데도 부모님은 동생의 학원비만 지원을 해주셨고 며칠 후 나는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안 받아들이면 어쩌겠는가. 고작해야 고등학생인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고등학생이라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원비를 벌 수도 있었긴 했겠구나 싶기도 한데, 그때는 딱히 그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도 않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시간을 뺏기고 체력을 뺏기면 그건 또 그거대로 학업에 좋을 건 아니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던 걸 보니, 여러 모로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었지만 나는 종종 학원을 좀 제대로 보내주셨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남아있는 상태였는데 등짝을 맞는 순간 서운함이 폭발했다.


-엄마, 애매하게 등짝 같은 데나 때리지 말고, 아주 팔이든 다리든 어디 하나 못 쓰게 흠씬 패세요. 아니면 눈 같은 데 찔러서 애꾸를 만들던가요. … 경찰에 확 신고해서 감옥에 보내게.


엄마는 내 험악한 상상력과 기세에 질려 말을 잇지 못하다가 빨리 씻고 자라고 했다. 악이 받혀서 '씻고 자려는데, 엄마가 지금 이렇게 등짝 때리신 거잖아요.'라고 대꾸하려다가 그냥 내 방으로 가 누웠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강렬하게 엄마를 원망하고 있었을까. 감옥에 보내고 싶을 정도로.





나중에서야 엄마가 나에게 끊임없이 집안일을 시키고 동생에게 밥을 챙겨 먹이라고 닦달한 심리학적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심리학자분들, 고마워요).


엄마들은 같은 성별인 딸을 자신과 동일하다고 느끼는 '동일화'감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을 딸이 당연히 해야 한다고 느끼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딸이 하고 싶을 거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을 내가 겪은 상황에 대입을 하자면, 엄마가 해야 했던 집안일을 내가 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것을 하지 않았던 나에게 그렇게 잔소리를 했던 것이다. 자신이 아들에게 밥을 먹이고 싶으니, 나도 동생에게 밥을 먹이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안 해먹이니 잔소리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칭찬을 하거나 고마워하지 않은 것이다. 엄마로서는 내가 '당연히 그걸 해야 하고, 하고 싶어 한다'라고 생각하니까.


'동일화'라는 감각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딸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자신이 느끼는 욕구를 딸도 느낄 거라고 생각하는 감각이기도 하다.


이미지출처 : <남남>


냉장고에 정신없이 넣어져 있는 식료품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이걸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엄마들은 딸도 자신만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아들에게만 사교육을 지원하면서, 딸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는 것이다. 엄마에게 딸은 동일화된 존재이므로 똑같은 것을 원한다고 생각하니까.


엄마가 나에게 왜 그랬는지 심리학적으로 이유가 있었다는 걸 알긴 알겠다. 아, 그렇구나 하는 마음인 거지 그렇다고 내 마음이 괜찮아지는 것은 또 아니다. 엄마의 욕구가 내 욕구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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