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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Sep 17. 2023

가족이라는 조별과제

불리한 팀플레이는 누구도 하고 싶어하지 않을 수밖에

대학생 때, 다큐멘터리 방송 구성안을 짜는 조별과제가 있었다. 교수님은 시의성, 참신성, 구성, 아이디어, 협동심 등을 보고 점수를 매기겠다고 했다. 다들 누구와 조를 짤지, 어떤 주제로 방송 구성안을 만들지 조금 부산스러워지고 있던 그때, 한 학생이 질문이 있다며 손을 들었다. 


"만약 혼자 하면 점수 안 좋게 주실 건가요?"


"조별과제라는 게 꼭 글만 잘 쓰고 구성안만 잘 짜라고 주는 게 아니고 여럿이서 팀워크 기르라고 내는 부분도 있는 과제야. 당연히 갈등도 겪겠지. 그걸 조율하는 능력을 지금부터 길러야 되니까. 너희들이 졸업하고 회사생활하면 겪어야 되는 과정을, 내가 학교라는 틀 안에서 미리 겪게 해줘야 할 책임이 있으니까 주는 과제니까 힘들어도 왠만하면 조원 구해서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네. 그런데, 회사 가서 하게 되면 그때 하는 거고, 학교에서만큼은 그냥 혼자 하고 싶습니다. 다른 수업에서 조별과제 몇 번 했었는데, 조원들 이것저것 핑계대면서 빠지고, 그거 조율하고, 그런데도 결국 저 혼자 하느라 진빠지고, 너무 힘들었어서 꼭 A+ 안 받아도 되니까 그냥 혼자 하겠습니다."


교수님은 조금 탐탁지 않아 했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 그 학생에게 혼자 과제를 하도록 허락하셨다. 그 학생은 과제 발표때 교수님으로부터 주제를 잘 선정했고 구성도 탄탄하고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들도 많았다면서 꽤 칭찬을 받았지만 결국 B+정도의 점수를 받았다. 교수님이 덧붙였다. 


"말했다시피 팀워크도 이 과제의 중요한 부분이야. 아무리 잘 했더라도 사람들과의 갈등과 조율없이 혼자 완성한 과제에 만점을 줄 수는 없어." 




얼마 전에 카페에 앉아 있는데 40대 중후반 정도로 되어 보이는 여성 두 명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게 되었다. 


요즘 30대 여자애들 보면 다들 20대들만큼 관리 잘 해서 날씬하고 예쁘고 직장도 안정적인데 결혼도 안 하려 하고 그냥 남자 자체를 안 만나고 싶어한다며 왜들 그리 혼자 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비슷한 나이인 30대 남자애들을 만날 일이 있어 대화해보고 나서 그녀들이 왜 혼자 살 수 밖에 없는지 깨달았다고. 


30대 여자애들은 끊임없이 외모관리 지적당하면서 경제적 자립까지 완벽히 해야 그나마 인정을 받는데, 비슷한 나이인 30대 남자애들은 외모에 대해 지적을 받는 일도 적으니 관리도 덜하고, 딱히 안정적인 직장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왜인지 모르게 당당한데, 그러면서도 결혼하면 여자가 차려주는 밥 먹고 여자가 집안일 해주길 바라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그러니 여자애들이 굳이 남자를 만나 미래를 꿈꾸고 싶어하지 않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30대 초반즈음에 결혼을 해야지, 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 중에 하나였고. 


하지만 이제는 대부분 비혼을 디폴트값으로 두고, 결혼을 하는 게 자신의 삶에 확실한 베네핏이 있을 것 같을 때 한다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내가 서른 살이던 몇 년 전에는 이런 생각은 아주 이기적인 생각이었고, 특히 집안 어른들로부터 심한 간섭을 받았었다. 간혹 직장 상사들로부터도.  






카페에서 본 40대 여성들이 말한 '관리 잘하고 직장도 안정적인 30대 여자애들' 이야기를 들으며 오래전 만점을 받지 않아도 괜찮으니 조별과제 대신 혼자과제를 하겠다고 하던 학생이 생각났다. 그 학생은 혼자 한 과제로 다른팀 3-4명이 모여 만든 과제만큼의 퀄리티를 만들고 그럼에도 만점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별 불만 없이 그 점수를 받아들였다.   


나는 사회가 말하는 '정상 가정을 꾸린다'는 게 대학의 조별과제와 상당 부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적 능력을 갖춘 30대 여성들은 어린 시절 자신의 어머니가 평생 고생했다는 피드백 하나 안 주는 환경(=가정)에서 삼시세끼 밥을 차리고 어쩌면 그러면서도 일까지 해야 했을 것이고, 그런 환경에서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무의식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혼자 살아서 일과 가사노동을 둘 다 해본 1인 가구라면 자연스레 알 것이다. 집안일이라는 게, 회사일을 하는 것보다 피로도가 높고 만족도는 덜 한 노동이라는 걸. 금전적 보상이 전혀 없이, 그저 개인적인 만족 말고는 주어지는 게 없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회사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생은 시키고 욕은 하더라도 대신 돈으로 칭찬한다는 경제적 거래라도 있는데, 가정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생을 아무리 해도 절대 돈으로 보상받지 못하면서 고생했다고 토닥여줄지 확실하지 않은데, 고생했다는 그 토닥임으로도 딱히 보상되는 것이 아닌 게, 바로 가사 노동이니까. 


그래서 더 이상 가정이라는 팀플레이를 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이 늘어나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어떠한 긍정적인 피드백도 없고, 경제적 혜택도 없지만 안 하거나 못 하면 비난을 받는 역할. 온가족의 모든 일상생활을 문제 없이 돌아가게 해야하는, 거기서 개인적 만족을 느낀다면 모를까 그 외에는 아무 혜택도 없는 가사노동이라는 '조별과제'를 혼자 해야 하는 아내이자 엄마라는 포지션. 


'가족'이라는 팀플레이를 시작하는 순간, 결혼한 여성(엄마, 아내)의 포지션이 얼마나 불리해지는지 오랜 시간 봐온 사람으로서, 능력있고 관리 잘한 그 여성들이 '가정이라는 조별과제'의 엄마+아내 포지션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래서 아무리 사회에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구성원에게만 A+를 준다고 해도, 그냥 혼자서 살면서 B+인 존재로 사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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