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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May 06. 2024

부모자격시험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시험에 실격해도 부모가 될 수 있겠지만

인간실격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이자, 유명한 문장이 있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하도 유명한 책이라서 읽긴 읽었다. 1948년 일본의 전쟁 패배 이후 일본 청년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 천만부나 팔린 베스트셀러인 이 소설의, 이 문장이 나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 죄송합니다."


나는 오늘 한 20번, 혹은 30번쯤 이 문장을 말한 것 같다. 오늘 뿐만이 아니다. 일이 꼬이면 컴플레인을 방어하기 위해 나는 죽을 죄를 지은 사람처럼, 몇 번이고, 몇 십명한테고 이 문장을 말한다. 내 잘못일 때도 있고 상황 잘못일 때도 있고, 여러 가지 변수가 다 같이 몰려와서 사과해야 할 때도 있다. 


나는 내 잘못인지 상황 때문인지 따지지 않는다, 일단 사과한다. 상대방이 설명을 원하면 충분한 설명과 함께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되어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하다고, 사과한다.


나는 마치 사과하러 태어난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를 연발한다. 


내가 지금껏 말한 '죄송합니다'를 모으면 모르긴 몰라도 몇 천번, 혹은 만번쯤은 되지 않을까 싶다(나는 민원센터와 고객센터, 그리고 현장에서 누군가를 응대하는 일은 10년 넘게 하고 있다). 


하지만 한 번도, 단 한번도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내가 아무리 뭘 잘못했어도,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감정이나 판단은 들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엄마나 아빠가 '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이 고생을 하는 거'라는 뉘앙스로 10살 내외의 나와 동생에게 매일매일 넋두리를 해서 눈치가 보일 때조차도. 


꽤나 이성적이고 냉정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저 얘기를 매일같이 듣자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도 했다. '아니, 저희가 낳아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부모자격시험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자녀에게 하면 안 될 행동들을 할 성인이라면 자격시험에서 떨어뜨리고, 스스로 부모가 될 기회에 대해 재고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이런 문제를 내고 어떤 대처를 할 것인지 점수를 매겨서 일정 점수를 넘기지 못하면 운전면허시험처럼 탈락시키는 것이다.


1. 당신은 지금 아버지(혹은 어머니)이다. 너무 피곤한데 아이가 놀러가자고 하면 당신은 당신의 편안을 추구할 것인가,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것인가?


a. 내 편안이 중요하다. 아이에겐 그냥 다음에 놀러가자고 한다. 

b. 내 편안이 중요하지만 아이의 욕구도 중요하다. 조금만 있다가 몇 시간 후 놀러가자고 한다. 

c. 내 편안보다 아이의 행복이 중요하다. 아이와 소중한 추억을 쌓을 기회! 피로를 무름쓰고 바로 놀러갈 준비를 한다. 


2. 시어머니가 너무 빡치게 한다. 당신은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 것인가?

a. 시어머니에게 말을 조심해달라고 한다. 

b. 남편에게 중간역할을 잘 해달라고 한다. 

c. 남편을 닮은 아이가 꼴보기 싫어서 아이를 족친다. 


3. 아이가 부담되는 금액의 공부는 아니지만 딱히 재능이 없는 분야의 어떤 걸 꼭 배우고 싶어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a. 아우, 돈 아까워. 니가 뭔데? 그냥 공부나 해~. 

b. OO아, 그걸 꼭 배워야할까? 재능이 없음을 알려주고 아이를 설득한다. 

c. 큰 금액도 아닌데 어린 시절에 이것저것 배우려는 의지가 기특하네. 한번 배워봐, 하고 일단은 지원해준다.   


뭐 대충 이런 식으로 한 50문항 정도 만들어서 일정 점수를 넘기지 못하면 부모가 되는 걸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거기서 떨어진다고 피임을 시킬 수야 없겠지만). 우선 스스로 부모가 된다는 것의 무게를 알고 부모가 되는 사람과, 그냥 결혼했으니 아이를 가져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고, 아이는 부모에게 당연히 감사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밑에서 자라는 아이의 행복은 다를 것이다. 


오늘 죄송합니다, 소리를 너무 많이 해서 내가 머리가 이상해진 걸까? 어쨌거나 나는 태어나서 죄송하지는 않다. '태어남'이라는 상황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 나의 개입이 정말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상황에까지 사과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내가 낸 문제이기도 해서 일단 부모자격시험 1번 문제를 풀어보기로 했다(아직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지만). 


1. 당신은 지금 아버지(혹은 어머니)이다. 너무 피곤한데 아이가 놀러가자고 하면 당신은 당신의 편안을 추구할 것인가,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것인가?


a. 내 편안이 중요하다. 아이에겐 그냥 다음에 놀러가자고 한다. 


나는 (되고 싶지도 않지만) 아직 부모될 자격이 없는 것 같네. 다음 문제를 안 풀어봐도 될 것 같다. 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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