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 대하여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라는 책으로 독서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전문직 여성이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정말이지 엄마가 원하는 딸이 되고 싶어요.”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서른이 안 된 어린 나이에 꽤 괜찮은 직군의 직업을 가진 여성이었기 때문에 ’와, 내가 저 사람 어머니면 진짜 딸 잘 키웠다고 뿌듯했을 듯.‘ 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여자가, 엄마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언젠가 오랜 친구와 술을 마시며 엄마에게 섭섭한 얘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자신이 겪은 받아쓰기 관련한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 초등학생 때 자신이 받아쓰기 1개를 틀려온 날, 연년생인 남동생은 6개를 틀려왔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엄마에게 아직도 이중받침이 그렇게 어렵냐며 (‘밟다‘라고 써야 하는 것을 ’밝다‘ 이런 식으로 써서 틀렸다고 했다) 20분 가까이 꾸중을 듣고 풀이 죽어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받침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 동생이 받아쓰기 시험지를 들고 와서 40점 받았다고 얘기를 하는 것이 들렸다.
40점 받은 걸 뭐 저리 크게 말하나 싶어 슬쩍 나가서 동생이 틀린 것을 슬쩍 보니 너무 쉬워서 ‘아니, 이런 걸 다 틀릴 수가 있나?’ 싶은 문제들이어서 얘는 또 얼마나 꾸중을 들으려나 자기가 더 걱정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동생을 너~무 칭찬하며 말했다.
“아이구, 우리 ㅇㅇ이 4개나 맞췄어요~? 나가서 맛있는 거 사먹고 와.“ 하며 용돈을 주었다고 했다. 친구는 속 상한 것보다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엄마의 ‘칭찬의 기준’은 도대체 뭐지?’
‘엄마가 원하는 딸이 되고 싶어요.’라는 이미 꽤 괜찮은 여성의 말과 친구의 받아쓰기 일화가 왜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 있냐면, 그 여성과 내 친구, 그리고 내가 엄마가 원하는 딸이 될 수 없기 때문임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엄마 마음에 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엄마들은 우리들을 한없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우리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 되어도(사회적으로 괜찮은 직업을 가져도, 시험을 잘 쳐와도, 엄마에게 꼬박꼬박 용돈을 드려도) 만족할 생각이 없는 엄마들이 있다(물론 세상에는 훌륭한 어머니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 어머니가 내 어머니가 아닐 뿐.)
어릴 땐, 그리고 겨우 몇 년 전까지도 내가 더 잘하면 엄마가 나의 가치를 알아줄 거라고 착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아니다. 딸의 가치를 알아주는 엄마라면 딸이 실수를 해도, 뭘 잘 하지 못 해도 소중하게 대하고 아껴준다. 우리의 다음을 응원하면서. 작은 실수 하나에 눈에 불을 켜고 쥐잡듯이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때 엄마가 나에게 (혹은 아이에게) 어떻게 했어야 한다, 고 섣불리 말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양육 방식에 대해 훈계질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 어떻게 했어야 한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남동생과 비교도 안 되게 ‘시험을 잘 보고 와서도 혼난 친구’나 ‘이미 괜찮은 직업인인데도 엄마 마음에 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여성’이나 ‘꼬박꼬박 용돈을 드렸는데 용돈 드리던 날짜에서 이틀 늦었다는 이유로 지독하게 꾸중 들었던 나’나 우리는 엄마의 마음에 들기는 글렀다. 정말이지 텄다 텄어.
왜냐하면, 엄마들은 우리를 마음에 들어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