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기로 한 날, 쉬지 않은 것 같은 날!

2월 3일. Day 11 in 후쿠오카

by 사진 찍는 미미

오늘의 일정

*사가(佐哿) 현 카라츠(唐津), 마츠바라(松原) [일정엔 이렇게 있었으나 가지 않음]


계획된 일정은 마츠바라에 가는 날인데, 쉬기로 했다.

걷거나 일정 소화하는 데 문제는 없으나, 어제 노코노마치에 갔다가 많이 실망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고, 관광지를 찾아가다 보니 겨울이고, 평일이고 사람이 없는 탓에, 그다지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게 큰 이유였다.


찬밥 데우고 일본식 밑반찬뿐인 ‘황후의 식탁에 걸인의 밥과 찬’으로 아침을 먹고 이 동네 가 볼 곳을 검색했다. 느지막이 fuk coffee로 출발. 가다가 주변을 살펴보니 한 번쯤은 와 본 길 같았다. 더욱이 깜짝 놀라겠는 건

어! 여기가 이렇게 가깝고 걸을 수 있는 거리였나? 한 것이었다.

다른 곳을 목적지로 왔다가 지나쳤던 여기가 이곳을 목적지로 오니 얼마 걸리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안내지도에 그때그때의 목적지만 입력하고 다닌 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걸음걸이의 시행착오를 겪었던 걸까? 미루어 짐작이 갔다.

지도를 펴 놓고 동서남북이라도 알고 왔더라면, 가고 싶은 곳의 위치들을 대략적으로라도 알고 왔더라면, 담에 다시 이런 기회가 생긴다면 지금처럼 하지 않겠다는 반성과 결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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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하려는 사람들이 서 너팀 정도 있다. 빨리빨리 줄이 줄지 않는다. ㅎㅎㅎ

카메라 가방은 메고, 노트북 가방은 크로스로 걸치고, 카메라 한 대는 들고 기다리자니 무게감이 더했다.

무거운 걸 들고 메고 하루도 빠짐없이 걸으니, 이번에 키가 더 줄을 것 같다고 막내딸에게 말했던 게 생각이 났다.

자그마한 카페라서 노트북으로 작업하기는커녕 몇 개의 테이블 빼고는 앉을 수 있는 것은 벽에 붙어있는 동그란 봉으로 되어 있는 의자? 한 시간 버티면 커피 한잔 공짜로 준다면 모를까 오래 있지도 못하겠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고, 사진으로 미리 보고 간 아이스 푸딩을 주문했다.


알바 청년이 뭐라 뭐라 한다 하도 빨리 말하니 못 알아듣는다. 우물우물 입속으로 혼잣말을 하는 것 같다. 두어 번 다시 말해달라고 하니

어디에서 왔냐고 묻기에 한국사람이라고 했더니 번역기를 입력해 보여준다.

1인 1 음료

이 간단한 말을 뭐 그리 힘들고 길게 했는지,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더라면 알아들었을 텐데, 짜증이 났지만, 여러 사람 상대하려니 쉬운 일은 아닐 테지라고 이해해야 했다.

원래 계획은 아이스푸딩과 라테를 다 먹어보자였는데 앉아 있을 곳이 없으니 오래 있지 못할 것 같아서 라테는 이따 점심 먹고 다른 카페에 가서 마시려고 푸딩만 시켰었던 건데 아이스 푸딩마저 포기하고 안 먹을 것인가? 라테와 푸딩을 다 먹을 것인가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냥 취소하고 나가기엔 오래 기다렸었고, 한국사람이라고 이미 말해버린 터라 그럴 수 없었다.

미소까지 지으며 라테까지 다 달라고 했다.

알바 두 명이 하니 늦게 나온다. 의자도 아닌 봉에 걸터앉은 엉덩이가 배긴다.

친절과 배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기다리는 동안, 일본에 茶店이 있다면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용돈이 궁해지면 아버지가 계실 듯한 다방을 찾아갔고 마담이 주문해 주는 쌍화차 한 잔 마시고, 아버지는 보는 눈들이 있으니, 요구한 액수보다 용돈을 더 얹어 주셨었다. 낮은 조명에 무슨 색인지 모를 의자와 인테리어라고 할 수 없는 벽걸이 그림들과 가짜 꽃들. 아버지의 단골 망원동의 어느 다방이었다.

일본에도 그런 다방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황성옛터를 즐겨 부르시던 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트럼펫을 그렇게 잘 부셨다는. 미남이고 젠틀맨이었던 내 아버지!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겠다 하셨는 데 졸업하기 전 신랑감을 데리고 갔을 때 너무 실망을 하셔서 사윗감이 하는 절을 안 받으시려고 뒤돌아 앉으셨었다. 하지만 결혼을 한 후에는 사위들 중 젤 예뻐하셨고, 가장 아끼시던 버버리 머플러도 내 신랑한테만 살짝 주셨었다. 내 남편은 아직도 그 머플러를 잘 가지고 있다. 올해도 장인 생각하면서 두르겠지. 결혼 후 아기가 바로 안 생긴다고 걱정하고 있는 나에게 병에 든 알약을 가져다주셨는데 그때 차비라고 한 푼도 못 드리고 배웅해 드린 게 아버지에 대한 나의 후회막급한 일이다.

그 알약을(나중에 알고 보니 익모초였다) 먹고 생긴 아이가 큰 딸이고, 생전에 우리가 가면 그 아이를 무릎에서 내려놓질 않으셨다. 암으로 너무 많이 고생하시다가 우리 곁을 떠나셨는 데 지금 내 나이가 그때의 아버지보다 많다.

지금은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으로 나도 내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겠지...



많이 기다려, 보기에도 근사한 라테와 아이스 푸딩이 나왔지만,

먹어보고 나서 이내 후회했다.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특별나지도 않았고 난 이런 체험은 이젠 안 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혼자 먹으니 더 그랬을지도 몰랐다.

열량이 많은 걸 먹었으니, 오늘도 할 수 없이 만보는 걸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노트북을 들고 나왔어서 어딘가는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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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커피점에서 나와 보니 유니클로, H.M 등이 있는 건물이 보였다.

들어가 보기로 했다.

손녀딸들의 옷을 파는 가게 앞에서 저절로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너무 예쁜 옷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은 내 사랑하는 두 손녀들. 맘에 드는 옷을 골라서 구석에 감춰놓고

매장을 다 둘러보았다. 기분이 참 좋다 ~

친절한 직원덕에 즉석에서 회원 가입하고 10% DC 받고 내 강아지들 선물을 샀다.

큰 딸아! 너도 내 새끼인데, 엄마가 작은 거라도 엄마 맘을 담아 준비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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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도 안 고프고, 숙소 근처 마트 가까이에 있는 카페에 가서 작업 좀 하고 회나 스시를 사서 오늘 저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집 근처 카페를 검색하고 걷는다.

어랏!!! 도착했다고 하는 데 처음 와본 곳이다. 체인점이라 같은 이름의 카페를 찾아준 것이었다.

한참을 되돌아 걸었다.

아무리 정확한 지도가 있어도 목적지를 잘못 입력하면 힘들어진다.

이건 누가 뭐래도 내 탓인 것이었다.

우리네 삶도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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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품인 듯 한 999엔짜리 김밥이라니? 비싸다는 생각에 살까 말까? 망설였지만 이미 다 팔리고 없었다.





회를 사서 집으로 오는 데 큰 사위의 영상통화음이 울렸다.

아가들과 통화하려고 하나보다 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들어오자마자 영상통화를 연결했다.

애들이 보고 싶다고 했단다.

춥지 않냐고 식사는 어떻게 하냐고 염려하는 큰 사위가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내가 보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나도 보고 싶다니까 막내 손녀가 “우리 집에 오면 되지”라고 말하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생각에 하루 피로가 다 사라졌다.

아이들 기침한다는 둥, 층간소음 때문에 매트를 깔았다는 둥 이런저런 근황을 알려주니 고마웠다.

참!!! 너무 맛있게 회를 먹었다.

역시 회는 정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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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이었는 데 쉬지 않은 날 같기도 하다.


10526보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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