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티치 Sep 14. 2021

[어느 주말] 3. 가장 달콤하고, 가장 아팠던

3. 베어물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치열한 독사과

가장 아팠지만 가장 편했던 나의 보금자리.


이제는 너를 떠올리지 않는다. 너와의 기억을, 너를 지운 채 그 때의 경험과 순간만을 종종 눈 감고 그려낼 뿐이다.


네가 내게 줬던 안락함과 따스함을 순식간에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넌 날 한 줌의 재로 바스라뜨리고 또 허공에 흩날린 채 떠나갔지만,


부정하려고 해도,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기이하게도 그 모든 순간은, 그 모든 아픔은 사랑이었다.

 





난 그 때 너의 존재와, 너와 함께하는 시간 덕분에 당시 처음 시작했던 색다른 생활을 겉돌면서도 애써 붙어 버틸 수 있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너에게 달려가서 안기면 되었으니까. 그러면 금새 회색빛으로 녹초가 되어있던 나는 온갖 색깔을 입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연이 되었다. 너의 존재만으로, 나는 충전됐다.


영화같았다. 우리의 사랑은. 아니, 이젠 내 것만으로 남은 그 사랑은 그랬다.


 

가장 미워하고 가장 사랑했던 나의 독사과


우리는 영화관에서 처음 만나 한 철 지난 독립영화를 봤다. 색감이 아련하게 화려한 영화였고, 급하게 전개되던 스토리가 어이 없어 튀어나온 숨길 수 없던 내 웃음 소리에 반하게 되었다고 너는 나중에 털어놓았지.


늦은 저녁을 사들고 턱수염을 기른 주인장이 있던 술집으로 향했다. 우리 둘 뿐인 그 공간에서 투박한 음질의 인디 노래가 흘러나왔다. 포스트잇에 꾸깃꾸깃 한아름의 노래 제목을 적어 계단 주인의 손 위로 몇 번을 오르락 내리락 오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고른 노래가 그 공간을 메울 때면, 그 곳은 우리 뿐인 곳이 아닌 우리만의 곳이 되었다.


아슬아슬 웃음 지은 채 서핑하는 사람이 그려졌던 그 맥주를 한 병 한 병 비워가며 대화의 향연이 무르익을 때쯤 잠자코 너의 눈을 바라봤다. 밝은 갈색의 눈이었다. 그 눈을 바라보다 보니, 손가락이 꿈틀거렸고, 난 반지를 끼고 있던 뭉툭한 내 엄지를 네 엄지 위에 올려놨다. 나머지 손가락으로도 너를 마저 찾으러 갔다. 그 때 너의 손톱들은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노란 형광등 불빛을 반사해냈다.


그 날 길게도 바라봤던 너의 눈동자는 잊혀지지 않는다. 맑은 갈색 호수 위에 검은 나뭇가지가 비적비적 솟아있던 너의 깊은 눈동자.


내 시선에 따라 커지고 작아졌던 너의 홍채는 깊은 우물을 쏘다니는 검은 고양이 같았다. 품에 안기러 달려오는 듯했다가 쏜살같이 달아나고 또 다시 달려와 나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들었지.


그 눈동자에 올려져있는 내 눈이 서로를 비추고 비추고 비추고를 반복하는데, 갑자기 온 세상이 주황빛으로 변하더라.


네 손을 내가 끌고 갔는지, 네가 내 손을 잡고 갔는지, 손은 잠깐 떨어뜨려 놓은 채 온기만을 부여잡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비릿해. 하지만 확실한 건, 그 때의 너와 나는 테이블 옆에 나란히 같이 앉을 수 있는 구석의 소파로 향했었어.


주인장 아저씨는 2층 나무계단 위의 어리숙한 대화를 주고받던 우리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짓다가 시선을 거둬주셨지.


심장을 콕콕 찌르는 음악으로 선곡이 바뀐 그 순간 네 입술은 살구빛으로 빛났고, 한참을 베어먹고 싶게도 생겼더라. 그렇게 너와 나는 만나게 되었었지. 서로의 세상이 되었었지. 네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고, 넌 내 세상을 버거워하면서 문을 두드리다가도 내가 틈새를 열어주면 금새 내 안으로 더 파고들었어.






생판 남이었던 너와 갑작스레 어쩌다가 만나게 됐는지 그 당시 사람들이 물으면 이런 저런 이야기를 가져다 던져놨지만, 사실은 네 갈색 눈동자와 살구빛으로 빛났던 입술 때문이었던 것 같아.


우린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고, 그 얘기들은 20대 중반의 뭉텅이처럼 쌓여있던 경계심을 차근차근 녹였어. 우리의 사랑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쌓아올렸다 무너졌다를 연거푸어 반복했지. 예측할 수 없었지만 파도처럼 높이 하늘을 가로지르다가 모래사장 위를 내리 꽂았던 그 관계는 나한테 너무나도 깊이 아로새겨졌었어.


우리가 항상 걸어다니던 골목 앞에서 나를 부둥켜안고 너가 엉엉 울면서 사과했던 날을 기억해. 너와 사귀고 나서 내가 처음으로 가장 힘들었던 날, 너를 저 끝까지 밀어내버렸고, 영영 손을 놓을 뻔하다가 너희 동네까지 말없이 따라가 엉엉 울면서 '미안해', '괜찮아'를 주고받으며 화해했던 날을 기억해. 내가 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막차 시간까지 일하던 늦은 시간에 먼 동네까지 찾아와서 매 주 나를 안아줬던 숱한 순간들을 기억해.


포동포동한 너의 볼살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다가 콕콕 눌렀을 때, 너가 짓는 찌뿌둥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발 아래부터 따뜻해지는 행복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이젠 다 나만의 추억이야.


그때의 우리는 일주일만 떨어져있어도 허전했고 서로의 온기를 그리워했지. 어떻게 그런게 가능했을까.




그냥 그랬었다고. 사랑했다고.

널 세상에서 제일 미워했지만 제일 사랑했고 나는 너무나도 미숙했지만 가장 치열하게 사랑했다고. 아직까지도 널 사랑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우리는 서로의 것이 아니니까.




잘 지내.


작가의 이전글 [어느 주말] 2. 줄어든 옷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