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 좋게도 꽤 많은 국가를 다녀봤다. 3개월 동안 누빈 유럽 13개국과 미국 동부와 캐나다 동부, 일본과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선교로 다녀온 말레이시아까지 다녀온 나라만 총합해도 벌써 19개국이다. 거기에 한국까지 포함한다면 20개국을 밟아본 셈이다. 지금껏 많은 나라를 여행하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던 경험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껏 방문한 19개국에서 무척 즐겁고 좋았던 기억도 많았었고, 때로는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지금도 기억나는 곳 역시 많았지만 단 한 번도 한국을 떠나 그곳에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이미 충분히 나는 한국에서의 패턴에 맞춰져 있고, 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을 오롯이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이곳, 파리에 사는 사람이 부러워졌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고 미술관 때문이었다.
누구든 유럽 여행 동안 자연스럽게 방문하게 되는 곳이 바로 미술관, 박물관이다. 특별히 그곳이 가고 싶어서라기보단, 우리가 익히 보고 배운 것들이 그곳에 많이 있기에 한 번쯤 유명한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하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유럽 여행에서 처음 미술관을 가보게 되었고, 내 생애 첫 미술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내가 미술관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깨달았다. 아득히 먼 과거에 그려진 그림에 때로는 감동했고, 자주 웃음 지었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그림에 나의 마음과 시선을 빼앗겼다.
처음 내셔널 갤러리를 갔던 그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처음 마주했던 그 그림들을 보면서 느꼈던 감상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과거 언젠가 TV를 통해서 알게 된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을 보지 못해서 아쉬웠던 마음 역시 잊지 못한다. 내가 런던에 머무는 당시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다른 곳으로 그림이 잠시 대여된 상태였고 그 이후에 방문한 다른 국가, 도시에서도 그 그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내셔널 갤러리를 다시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본 그림 역시 그때 못 봤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일 정도였다. 그만큼 나에게 각별했고, 기대되었던 그림 중 하나가 바로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다. 5년이 지나, 내셔널 갤러리에서 드디어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을 마주한 뒤 조금 오래 머물며 나의 눈으로 그림을 가득 담았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느낀 감동을 가지고, 낭만과 예술의 도시 파리로 떠나며 나는 약간의 기대를 했었다. 어떤 작품이 또 나를 감동하게 할지, 나에게 다가올지 기대했다. 파리에 도착한 지 5일째인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온다기에 루브르 박물관과 오랑주리, 오르세 미술관을 다녀오기로 했다. 뮤지엄 패스를 구입하기 위해 비교적 줄이 짧을 것으로 예상되는 오랑주리 미술관을 먼저 갔다. 오랑주리 미술관 역시 많은 이가 찾는 유명 미술관이지만, 오르세 미술관과 루브르 박물관 만큼은 아니기에 조금은 줄이 없기를 기대하며 갔다. 약간의 기대와 함께 조바심을 가지고 방문한 그곳에서 나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무리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저 무리는 뭐지 하는 물음이었지만, 이내 그 무리가 현장 체험학습의 개념으로 미술관을 찾았음을 알게 되었다. 일반 가이드 투어나, 단체관광객들과는 다르게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고 생기발랄한 아이들로 무리가 구성되어있었다.
마치 우리가 국립 현대 박물관으로 가거나, 용산 가족 공원으로 현장 체험학습을 떠나듯이, 그 친구들은 오랑주리, 루브르, 오르세로 현장 체험학습을 온 것으로 보였다. 이후 방문한 루브르, 오르세에서도 교사와 학생들의 무리는 계속 눈에 띄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아이들이 부러워졌다. 그림을 좋아하는 것을 알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돈을 투자해서 와야 하는 나와 달리 그 친구들은 조금은 쉽게 이곳에 올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많이 질투가 났다.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그들이 배우는 것들이 정말 부러워졌다. 나와 같은 여행자에게 오르세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오랑주리 미술관은 인생에 한 번 오기도 힘든 곳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림을 보기보단, 그림을 봤다는 셀카를 찍기 바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장 체험학습을 온 것으로 보이는 그 아이들은 마치 내가 학창시절 국립 현대 박물관을 갔을 때처럼 하품하면서, 그림이 아니라 관광객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림은 그곳에 있는 그림은 어떤 의미일까. 그곳을 방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본다.
최근 들은 말 중에서 무척이나 신기했던 표현이 있다. 혹시 맥세권, 썹세권을 들어봤는가?
멕세권, 썹세권은 역과 가까운 곳에 집이 있다는 역세권의 의미와 같다. 역과 근처에 산다는 이유로 편리함을 누리는 역세권처럼, 맥도날드 근처에 집이 있는 사람은 맥세권, 써브웨이 근처에 집이 있는 사람은 썹세권을 누린다고 이야기한다. 오늘 현장 체험학습을 온 친구들은 오르세권, 루브르세권, 오랑주리세권을 누리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는 곳, 오늘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충분히 다시 올 수 있는 곳일 것이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어쩌면 지금이 내가 이곳을 올 수 있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계속 나의 마음속을 맴돌곤 한다. 그래서 난 어떻게든 사진과 같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애쓰고,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서 노력했다. 나의 시간을 쪼개고, 나의 몸을 혹사해서라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누리기 위해 애썼다. 그런 여행자로서 나는 오늘 그 친구들이 정말 정말 정말 부러웠다. 처음으로 유럽에 사는 것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음식도, 집도, 사람도 아니라 아름다운 그림 때문에.
다시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내가 다시 이 도시, 이 미술관, 이 박물관을 보기 위해서는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알지 못하기에 더 그렇다. 부질없는 부러움, 의미 없는 질투일지 모르지만 나는 처음으로 오르세권, 루브르세권, 오랑주리세권을 누리고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졌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누리는 그 행복이 무척이나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