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의외로 좁은 세상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잘 들어가고~!”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직장인들에게는 가장 설레는 시간이 아닐까? 하지만 나에게는 조금 다른 시간이다. 회사부터 집까지 직선거리로만 60km가 넘으니 퇴근을 할 때도 셔틀버스에서 보내는 시간이 엄청나다. 초기에는 대부분 집에 갈 때까지 잠으로 시간을 보냈지만 이렇게 잠을 계속 잤더니 정작 밤에는 잠이 오지 않는 문제가 발생을 하여 이제는 정말 피곤할 때 아니면 잠을 자지 않는다. (낮잠이라고 표현하기도 좀 애매하고 밤잠이라고 표현하기도 좀 애매한데 저녁잠 정도로 표현을 하면 옳을까?)
대부분의 직원들도 나와 마찬가지인가보다. 아침에는 거의 잠으로 통일되어 있는 모습이었는데 퇴근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있다. 서울의 여느 지하철이나 버스에서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감상하고 있다. 아마 인터넷 웹 검색율 관련하여 시장조사를 나오면 우리 셔틀버스에서 20분만 있으면 40명쯤은 조사가 가능할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앉은 키가 굉장히 크다보니(키가 크다.... 크다고...) 뒤에서 보았을 때 앞의 화면이 종종 보이곤 한다.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데 나도 모르게 그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지기도 하는데 그 때문에 실제로 화면에 나오는 자막이나 인물 등을 검색을 해서 실제로 본 적도 있다. 이런 게 바로 구전 효과의 진수 아닐까?
퇴근 시간은 항상 일정치 않다. 그런데 나는 셔틀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하나를 놓치면 적어도 한 시간은 기다려야 다음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래서 빠르게 가야할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냥 저녁까지 느긋하게 먹고 퇴근하는 방향을 택하기도 한다. 이렇게라도 해야 야근비를 벌....(죄송합니다. 회사님)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퇴근 시간은 일정하지 않아도 퇴근 자체는 일정하게 하는 편이다. 그렇게 항상 같은 버스를 타다 보면 이런 일도 발생한다.
‘저 분은 항상 퇴근할 때 오른쪽 뒤에서 다섯 번째 앉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나도 어느새 버스를 타서 자리에 앉으면 왼쪽 뒤에서 네 번째를 항상 앉는다. 출근을 할 때나 퇴근을 할 때 거의 동일한 좌석만을 선호해서 그곳에만 앉곤 하는데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이 버스에 또 있었나보다. 그래서 희한하게도 일주일에 거의 절반 이상을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위치에서 퇴근을 하게 되었는데 심지어 내리는 곳도 같은 사람이 있었다.
나도 남자인지라 그 분이 남자였다면 정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겠지만 여자 분이셨기 때문에 매 번 뒷모습만 보다가 보니 앞모습도 궁금해지고 이름도 궁금해지기도 했다. 지금은 모바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과거에는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다녔으니 지나가다가 얼핏 보면 이름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계속 뒤에서만 내리고 다니다가 호기심이 발동해서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앞모습과 이름을 알아냈다. 이정도 의지라면 나도 스토커 기질이 좀 있는 거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반년쯤 지났을까?
“안녕하세요.”
“안녕하.....에?”
와, 세상에 너무나 친한 사람인 줄 알았다. 퇴근할 때만 보는 사람을 사내에서 그냥 지나가다가 인사를 해 버린 것이다. 뭐, 인사를 했다고 해서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 나도 지나가다가 왜 인사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상대방도 그냥 지나치면 될 것 같은데 덩달아 인사를 하더라. 중간에 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저 분도 나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일까? 하긴 그렇게 대놓고 쳐다본 적도 있는데 얼굴이 익숙하긴 할 거다. 그나저나 정작 퇴근 때는 또 얼굴을 봐야 하는데 이번엔 어찌 쳐다봐야 하나? 모르는 척을 해야 할까?
“안녕하세요.”
“안녕하....에?”
입장이 바뀌었다. 퇴근 때 먼저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 그 분이 먼저 인사를 했다. 아 참고를 하자면 내가 좀 더 젊었거나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이런 모습은 분명 로맨스 같은 느낌이겠지만 이미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고 또 난 가정을 지켜야 하고...... 심지어 내릴 때는 내일 또 뵙자고 하고 내린다. 와!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지?
‘결코 불륜은 안 되고 혹시 내 행동거지가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부터 다시 생각을 좀 해보자. 그리고 또......’
돌아가는 길에 여러 가지 상상의 나래를 피우면서 혼자 집에서 궁시렁 대면서 갔었고 알 수 없는 자부심(?)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대체 다음 날은 또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까?
“안녕하세요.”
“안녕하...에?”
마치 Ctrl+V를 한 듯 이 대화는 다음 날 유관부서 회의 때 또 나타났다. 유관부서 담당자가 바뀌었는데 상대방이 그 분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도 맨날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있길래 얼굴 정도만 익혀 놨는데 오다가다 사원증에 이름도 확인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부서 담당이 바뀌면서 회의체에 가야 하는데 익숙한 이름이 있어서 검색을 해 보니 아는 얼굴이라 반가웠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내가 인사를 먼저 해서 당연히 알고 인사를 한 줄 알았다고 그러더라. 역시, 나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 아니었어......
지금은 내가 이사를 갔고 그 부서와 업무를 같이 하지 않는 상태라서 서서히 머리 속에서 잊혀져 갔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왠지 부끄럽기도 재미있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실한 것은 어디 가서 나쁜 짓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지나가다가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원한 같은 거를 지게 되면 금방이라도 찾아와서 해코지 할 수 있지 않은가? 인연이라는 끈의 무서움을 알게 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