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미처 못 버린 옷이랑 잡동사니랑 수납함 정리.
첫눈 오는 날에 캐롤을 들으며 하는 청소는 개운하다. ️
불과 어제 첫눈이 온다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적었는데 바로 그날 자정이 지나고 첫눈을 보았다. 아쉽지만 어제 적은 소망처럼 눈을 맞으며 공원을 돌아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에 와서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거실에 앉아 DVD를 보진 못했다. 겨울의 낭만은 크리스마스로 미뤄두기로 한다.
올해 가을은 이상 기후로 꽤 길었기에 낭만도 길었다. 그동안의 가을은 마치 차가운 흑당라떼와 같았다. 급하고 과격한 기후변화는 흑당이 우유에 채 녹기 전에 가을을 빼앗아 간다. 뭐든 적응이 느린 나는 한 계절의 분위기와 감성을 즐기는데도 시동을 걸어야 한다. 나만의 속도로 가을력(力)을 채우다 보면 가을이 이미 끝나버리고 만다. 녹다 만 감성만이 컵 아래 침전된 채로 떨떠름하게 겨울을 맞이하는 것이다. 설탕이 덜 녹았다며 입맛만 다셔봐도 별수 없다. 컵 바닥에 무거이 가라앉은 알갱이들을 빨대로 눌러봤자 녹다 만 가을날의 상념과 감성이 용해될 우유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 얼떨결에 평년보다 길게 주어진 이번 가을이 얼마나 좋았는지. 아마도 낭만을 충분히 녹인 달달한 라떼를 마셨음이리라.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첫눈으로 막을 내린 가을이 아쉽지 않다. 스물다섯 번째 가을이 여운 없이 끝났다. 깔끔한 끝맛의 가을이었다.
웃기다. 불과 하루 차이로 노르딩딩하던 세상이 하얗고 선명하다. 일조량에 컨디션이 좌우되는 나는 눈 오는 날이 기다려지면서도 막상 흐린 날씨에 몸이 늘어진다. 아무래도 항상성을 담당하는 시상하부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계절성 정동장애? 고작 계절 하나, 온도 조금, 날씨 살짝 바뀐다고 감정이 날뛰는 것이 억울하다. 하필 태어나도 사계절이 널을 뛰는 이 나라에 태어나서 네 번의 계절을 온전히 경험한다는 사실은 나의 내면을 충만하게 하면서도 괴롭게 만든다. 감사하기만 했던 나의 예민함을 취업을 목전에 둔 내 상황에서 마냥 긍정할 수만은 없기에 혼자 억울해할 수밖에 없다. 다들 모두 나 같은 사람이니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리 없는데.. 그렇다면 모두 감정들을 숨기고사는 건가. 다들 답답하겠다. 그러나 여느 의젓한 서울 사람들과 달리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는 나는 동경 127도, 북위 37도에 불시착한 외국인이다. 그런데 첫눈에 마음이 동한 외국인이 나만은 아니었는지 유독 감성적이었던 과거의 인연에게 연락이 왔다. 이름도, 얼굴도, 몇 살에 만나서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모두 흐릿하다. 떠오르는 것이라곤 남자치곤 유난히 여렸던 성품과 그 마음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한 미안함이 고작이다.
내가 일하는 곳. 비주류의 빌딩.
고령자, 외노자, 구직 청년, 마을공동체, 사회적경제.
이 비주류의 빌딩을 떠날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1층 카페에서 파는 훠궈 맛이 나는 얼그레이 바닐라라떼(샷추가)도 어서 마셔둬야 한다.
노인 일자리 사업 참여자 여사님, 대리님들, 주임님들, 차장님들, 그리고 다른 인턴분들과도 재밌게 잘 어울리고 있다. 지난 세 달 동안 오후 교육 사업 하나를 도맡아서 운영했고, 이번 사업이 마무리됨에 따라 성과보고집도 내가 만들게 되었다.^^;; 고작 네 달짜리 인턴 주제에 매일 같이 소처럼 일하고 있다. 인턴 셋이 모두 일을 많이 하니 10층의 모든 사람은 우리를 매일 같이 부둥부둥해주신다.
사무실에서 내 자리는 말단의 자리답게 방어에 쥐약이다. 사무실은 세 개의 부서가 나눠 쓰고 있고 우리 팀은 사무실 정중앙에 배치되어 있는데, 나의 왼쪽에는 출입문이 있고, 왼쪽 대각선 뒤로는 탕비실과 탁자가 있다. 게다가 우리 사무실에서 가장 바쁜 S차장님의 유일한 동선이 내 자리 뒤를 지나기에, 차장님께 보고를 드리는 모든 사람과 손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내 자리를 향하게 된다. 언제나 위풍당당하게 입장해 나와 내 맞은편 Y대리님의 파티션 위에 팔을 괴고 업무 지시를 내리시는 센터장님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오늘만 해도 센터장님은 괜히 한 번 내 등을 쓸어내리시고는 끝나지 않는 옆 팀 쌀문제를 해결하러 가셨다. 옆 팀 주임님들과 우리 층 문지기 여사님은 내가 쓰는 핸드크림 향이 마음에 드신다며 사진을 찍어가셨고 대리님과 차장님은 괜히 한두 번씩 기웃거리시면서 혹시라도 내가 업무 중에 심심할까봐 잊지 않고 심부름도 주신다.
“피피티도 우리 예지처럼 러브러브하넹~^^” (<- 미리캔버스 갖다 썼다.)
"우리 예지가 피피티 세 개나 만들었어!( 'O' )" (<- 차장님이 바쁘시길래 만들어드렸다.)
“예지 이건 프린트 안해줄거양~?” (<- 괜히 장난스레 말을 걸어보신다.)
오며 가며 흐르는 대화 속에 내가 내년에도 이 기관에 머무르길 바라는 마음도 느껴진다. 그래봤자 난 한 달 뒤면 사라질 사람인데 이곳의 사람들은 너무 다정하다. 그래서 나는 이곳과 잘 어울린다. 나는 다정하고, 개인의 다양한 모습들을 고려할 줄 알며, 갈등 상황을 부드럽게 풀어낼 줄도 안다. 이곳에서 일하며 나의 재능은 개인을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단 걸 깨닫는다. 무엇보다도 모두가 실현 가능성이 큰 선택에 집중할 때, 실현 확률은 낮아도 고민의 당사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선택을 할 용기를 주는 사람이다.
아빠는 나를 존중하지만 유독 내가 속한 집단 안의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짢아한다. 부적응의 경우에 대해서는 위로를 하지만 아주 잘 적응하는 경우에는 쓸데없는 것에 기뻐한다고 여긴다. 조직 안에서의 소통과 인간관계가 업무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일까? 자존심이 상한다. 지나치게 차분하고 점잖은 우리 집에서 유독 날뛰고 반항심 강한 나는 어릴 적부터 아빠에게 요주의 인물이었다. 늘 차분하고 침착하게 천천히 하라는 말을 들어왔으니 자기 검열이 심한 아이로 자라왔고, 중고등학교 친구들은 나를 진지하고 신중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한 번은 내가 반 친구들에게 던진 농담에 대해 모두가 진실인 줄 알고 수긍을 했다. 난 내가 애교도 많고 붙임성도 좋은 사람이란 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보다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일 거라고 이해해 본다. 고3 수능을 마치고서 운전면허를 따려는 나를 말린 것도, 올해 초 기획자로 취업을 하려던 나를 말린 것 역시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난 여전히 운전도 못하고 취업도 못한 사람이다.
교육 전날 신청자들에게 확인 전화를 돌리는 일은 지극히 일상적인 업무다. 전화를 하다 보면 특히 고령의 어른들로 갈수록 작은 배려에도 유독 감동을 느끼시는 분들이 많다. 당신의 손으로 신청한 교육임에도 기회를 얻는 것에 감사를 전한다. 교육장에 준비된 간단한 다과마저도 과분히 느끼는 그들을 보며 깨닫는다. 그들의 시대는 당연히 쥐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지도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부모 세대인 신중년층도 교육과 소득 수준에 따라 그 격차를 실감한다. 자신의 삶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 변화를 만들어야 할지 모르기에 교수님을 붙잡고 개인의 문제를 호소하기도 한다.
이들을 보며 느끼는 가장 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그들이 현재의 환경에서 자신을 제한하거나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익숙한 역할 속에 갇혀 스스로의 욕구와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세대와 성별이라는 틀로는 규정되지 않는 순수한 가능성을 본다. 어른들은 이미 삶을 통해 단단해졌지만 근대적 교육을 받은 이들은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탄력성이 부족할 수 있다. 각자의 가능성은 스스로 발견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드러나야 하지만 그 시작을 돕는 마중물이 필요하다. 나는 내가 사람들의 잠재력을 캘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안다. 아빠가 간과했던 나의 재능은 유효하다. 사랑 어린 통제에 고분고분하게 타협하면서 살 생각이 없다. 그 누구도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아빠의 인정만큼은 받아내고 말 것이다. 태현이가 해준 조언이 다시금 떠오르는 밤이다.
교육 참여자 한 분께서 나를 ‘선한’ 예지씨라고 표현하시는 게 기분이 이상하다. 내가 선한 사람인가? 착해서라기보단 우연히 나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과 동일 선상에 있을 뿐이다.
호기롭게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밤 10시에 친구와 폴짝거리며 동네 공원으로 달려갔다가 눈사람이 되어 집으로 들어오며 마무리한 하루. 몇 분 밖을 걸었을 뿐인데 온몸으로 눈발이 매섭게 들이친다. 올 겨울은 얼마나 혹독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