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를 베는 시기이다. 수확하는 시기에 태풍이 잦아 농민들의 시름이 적지 않다.
60~70년대엔 이렇게 이른 시기에 벼를 베었던 적이 없었을 듯싶다. 기후가 많이 변하기도 했지만 볍씨도 많은 개량이 이어져 왔음이다. 내가 아는 시골 친구 녀석은 매년 첫 수확한 벼이삭을 한 움큼 잘라 집으로 가져온 후 기념하기도 한다.
요즘 벼 베기는 콤바인을 이용해 벼 베기와 탈곡이 동시에 이루어지지만 예전 내가 어릴 적엔 모든 것이 시간을 갖고 천천히 그리고 사람 손으로 이뤄졌다.
벼베기를 하는 집주인은 며칠 전부터 남들보다 한 발이라도 먼저 품을 사기 위해 동네를 이 잡듯이 돌아다녔고, 가을걷이를 하는 날 아침이면 벼를 수확하는 집은 새벽 서너 시부터 아침을 준비했다. 동이 트기도 전인데도 벼를 베 주기로 다짐받은 이들이 하나둘씩 낫을 들고 집 대문을 들어선다. 벼를 베는 집 마당에는 멍석 깔리고 아침 밥상이 이미 차려져 있다.
조석으로 쌀쌀한 날씨이기에 반찬과 국은 아마도 따뜻한 것 일색이었을 것이다. 주방의 조리기구가 다양하지 않고 화덕도 매한가지이니 음식을 준비하는 이의 고충 또한 컸을 것이지만 첫 수확이 주는 기쁨에는 비할 것은 아니었을 것 같다.
농부라면 모두가 이 순간을 위해 그 힘든 여름을 보냈을 것이다. 그 당시의 국이나 밥그릇 그리고 반찬 그릇류는 온통 무거운 사기그릇이었다. 무겁기에 자주 떨어트리기도 해서 요즘 같이 타일이나 시멘트 바닥이었다면 무조건 박살이 날 수도 있었지만 부엌이나 설거지를 하는 마당이 흙으로 되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쨌든 완전히 깨어지지는 않았지만 충격으로 이가 나가는 것들은 많았다. 금이 간 곳이 누렇게 변해 있던 것이 생각나기도 한다.
또한 들판을 지나다 보면 갓길이나 수로에 간혹 깨진 밥그릇 조각이 왕왕 모습을 드러냈고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이 깨진 사기그릇 조각을 칭하는 사금파리에 상처도 입었다. 흰색의 사기그릇엔 청색 혹은 녹색에 가까운 색채로 테를 두르기도 하고 장수와 복을 바라는 한자 문양이 새겨져 있기도 했다. 간혹 집안에 어르신이 계신 집에는 놋쇠 그릇도 많이 사용했는데 아이 입장에서는 놋쇠 젓가락질 하기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보통의 힘으로는 닦기도 옮기기도 여간 힘에 부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가져본 것도 아마 초등학교를 들어서고 였지 않았을까 싶다. 일꾼들도 일할 집에 오기 전에 각자의 집에서 가족들이 먹을 밥을 준비해 놓고 나오기에 품을 사는 집이나 품을 파는 집이나 바쁘기는 매한가지였다.
일할 일꾼들이 모두 모여 함께 조반을 들고나면 일터로 나가는데 집집마다 수확할 논의 크기 등에 따라 일꾼들의 수가 달랐다. 보통 10명에서 많게는 20명이 넘기도 한다. 논 한 구간을 3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늘어서면 10명을 기준으로 대략 30미터 크기 정도로 벼 베기 작업이 진행될 수 있고 논이 좀 더 크면 더 넓은 크기로 벌려 서서 한다.
동네 사람만으로는 일꾼을 충당할 수 없을 때에는 산골 등 타지에서 사람을 얻어오기도 했다. 벼를 베는 사람들에게는 집안 사정에 따라 수건과 운동화가 제공됐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라는 속담 속의 그 낫은 낫 날의 날카로움 정도에 따라 벼 베기의 속도를 좌우하고 낫질하는 이의 품을 덜 들게 하기에 일을 나가기 전에 낫날 갈이는 필수였다. 숫돌에 물을 뿌리고 일정한 방향으로 날을 갈아가면서 숫돌 가루가 묻은 날을 물로 닦아 날카로움 정도를 견줘 가면서 날의 강도를 세워 간다.
추석이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오늘도 새벽 초승달은 차갑게 남쪽 하늘에 걸려있다.
들길엔 말라비틀어진 짙은 갈색의 콩잎이 서리를 덥고 앉아 있고 씨앗을 다 뿌리지 못한 질경이 꽃대가 질긴 허리를 쳐들고 있다.
두꺼운 양말에 흰 고무신을 신은 어르신은 물기에 신발이 벗겨질 새라 볏짚으로 발등 부위를 감싸 매기도 했다. 한낮의 더위를 막아줄 밀짚 모자에는 한국영화 필름이 이마 테두리 부분을 멋스럽게 장식했다. 어른들은 수건을 뒤춤에 찔러 넣기도 하고 목 주변을 감싸기도 했다.
공기가 맑고 서늘한 탓에 뒤늦게 벼를 베는 집의 경우에는 허옇게 내린 서리를 목장갑 하나로 견뎌내야 한다. 누렇게 익은 벼이삭과 잎사귀에는 차가운 물기가 벼 향기를 뱉어냈다. 태풍이 지나 간지 한 참 후이기도 하고 집주인이 논 바닥에 물길을 잘 터 놓아서인지 논 바닥은 구득 구득하게 잘 말라 작업하는데 불편함이 없다.
날카로운 낫의 반짝임이 벼 포기 밑동을 스치고 지나가면 한 번에 너댓뭉치의 벼 포기가 잘라진다. 낫질은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야구배트와 같이 무작정 휘두른다고 베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색이 짙은 갈색으로 변해 있는 벼 포기 밑동을 대략 10 내지 15도 정도의 각으로 순간적인 힘을 작용시켜 스피드 있게 잡아당겨야 베어질 수 있다. 너무 과하게 잡아당기면 낫의 끝 부문이 낫질하는 이의 정강이를 향할 수 도 있다. 베어진 벼 포기는 한 묶음이 될 수 있는 양으로 모아진다. 아침 해가 들판 끝 미루나무 꼭대기를 넘어서면 멀리서 아침 참을 준비한 며느리의 외침이 들린다.
베어진 볏단은 집주인이 며칠 동안을 뒤집는 작업을 통해 햇볕에 말려지고 다시 품을 산 일꾼들에 의해 묶어져 길게 세워진다. 탈곡하기 전까지 이렇게 말려진 후 탈곡 마당으로 향하게 된다.
시골에선 추석 전후에 마당을 곡괭이 등으로 파헤치고 물을 뿌려 반죽한 다음 평탄화 작업을 한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탈곡작업 중 유실될 수 있는 알곡을 알차게 챙겨낼 수 있고 한편으론 탈곡된 볍씨들을 말리는데 편리하기 때문이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