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만 해도 우리 시골 마을의 주택은 대부분 초가였고 초가라는 이름에 부합하게 지붕재료는 볏짚이었다. 농한기가 되면 집집마다 볏짚으로 이엉을 만드는 광경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기도 했다. 볏짚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기는 하지만 내구성이 크지 않아 볏짚 이엉은 1-2년에 한 번 정도는 교체가 필요했다. 어린 나이에도 새 볏짚으로 만든 이엉을 지붕에 얹고 나면 집이 괜히 환해진 느낌을 받기도 했다. 요즘으로 보면 페인트칠을 다시 해 집안이 화사해졌다고나 할까! 오래된 지붕의 이엉을 걷어 내다 보면 이엉 안쪽에서 굼벵이도 나오곤 했는데 커다랗게 돌돌 말린 굼벵이가 아이 입장에서는 무섭기 조차 했다. 색깔이 짙은 갈색으로 변한 초가지붕은 비가 오기라도 하면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조차 갈색이었다.
가끔은 비가 온 다음 지붕 위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기도 하고 버섯이 자라나기도 했다. 더 가끔은 풀씨가 내려앉아 풀밭이 되는 지붕도 있었다. 오래된 폐가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집안의 가장이 먼 곳으로 떠난 집들에서 간혹 그런 일들이 생겼다. 아버지의 부지런함 덕분에 항상 깨끗한 지붕을 하고 살았던 우리 집은 대신 그렇게 넓은 집은 아니었다. 충분히 혼자 이엉을 만들 수 있어서 그랬는지 암튼 해 거르지 않고 매년 새로운 지붕을 얹었던 것으로 단순히 기억한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서리가 하얗게 앉아 있는 배추밭 앞쪽 굴뚝 옆에 좌정하고 이엉을 엮어 나가셨다. 아마도 좀 전 지핀 군불 연기로 따뜻한 기운이 굴뚝을 감씨 안고 올라갈 것이라고 믿으셨는지 서리보다는 덜 하얀 목장갑을 끼시고 바삐 손을 움직이셨다. 고행이라도 하시려는 양 여명도 트기 전 냉랭한 기운이 도는 그 시각에 마치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 불자 마냥 아무 소리 없이 이엉을 엮어 가신다. 줄자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무엇으로 셈을 하셨는지 만들어진 이엉의 크기는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처럼 일정한 크기를 지녔다. 어느 날은 단지 한 개의 이엉 묶음만을 만드시고, 어느 날은 2~3개의 이엉 묶음단을 만드셨다. 지금 생각하면 준비된 볏짚단의 수로 이엉의 길이를 측정하셨나 보다. 볏짚단의 일정 수에 일정한 주먹 짐의 양으로 볏짚을 잡고 이엉을 엮어가셨기에 말이다. 보통은 한 줄 엮기 이엉이다. 새 짚은 묵은 짚에 비해 억센 편이어서 구부리기가 쉽지 않지만 묶은 집에 비해 내구성이 좋고 색상도 말끔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나에게 이엉을 엮어보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장난으로 또는 손의 크기가 작은 손으로 비슷한 수준의 이엉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없기에서였는지 모른다. 이엉 둥치 수가 20개를 넘어서면 이제 볏짚으로 용마루를 만드신다. 이엉이 볏짚의 머리 약간 밑쪽을 엮어가는 작업이라면 용마루는 볏짚머리를 서로 맞붙여 새끼줄과 함께 엮어가는 작업이다. 오늘 아버지의 이엉 엮기 작업은 조반을 드신 후에도 계속 이루어진다. 아마도 수일 내에 지붕을 하기로 동네 어른들과 날짜를 잡으셨나 보다. 동네 가호수가 200가구를 넘어서다 보니 정해 진 날을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기에 인근 어르신들끼리 더 추워지기 전에 지붕을 새로 하려고 부지런을 떠신다.
초가에 이엉을 새로 얹으려면 기존의 헌 이엉을 걷어 내야 한다. 이엉을 걷어내고 짚이 썩은 곳이나 파인 곳은 새 짚으로 메꿔주는데 이를 군새라고 한다. 그런 다음 새끼줄로 가로 세로 연이어 지붕을 안정화시키고 이엉을 올려 처마 부분부터 지붕을 감싸도록 한다. 이때의 새끼줄을 지붕 속에 맨다 하여 속고삿이라고 한다. 그런 다음 두 번째 이엉을 올려 첫 번째 올린 이엉과 같은 방법으로 지붕을 두르고 첫 번째 이엉의 짚과 서로 고정되도록 엮는다. 이엉 얹기를 다 마무리하면 새끼줄로 가로 세로 일정한 간격으로 얽어매 평고대 안쪽의 대나무로 된 연죽에 새끼줄을 고정시킨다. 이때의 새끼줄 이름은 속고삿과 반대되어 겉고삿이라고도 하고 고사 새끼라고도 한다. 이 작업이 끝나면 기스락 자르기라고 하여 추녀 끝으로 나온 불규칙한 이엉들을 잘라내 가지런하게 하는 작업을 한다. 방귀 매기는 양쪽 추녀 끝을 짧게 잘라서 처마의 끝머리를 둥그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평고대 안쪽에 참새들이 침입하지 않도록 흙으로 메꿔주는데 이를 새굴매기라고 한다.
아버지가 수행을 하시는 동안 아이들은 안방 아랫목에 캐시미어 이불을 덮고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린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마냥. 해가 중천을 향해 아침 기운을 털어내면 아버지는 아이를 부른다.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 구판장에 가서 막걸리 한통을 받아 오라고 하시며, 거북선이 그려진 담뱃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이신다. 그 시절 아버지의 담배 향은 왠지 모르게 구수했다는 느낌이다. 해로울 것 같은 느낌도 갖기 어려웠다. 막걸리 한통에 얼마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준 100원짜리 종이돈을 가지고 구판장에 가노라면 주인아주머니는 파란색 플라스틱 국자로 땅속에 박아둔 독에서 막걸리를 담아 올린다.
구판장에서 막걸리 한통을 들고 걸어서 올 때면 주전자에 들어 있는 막걸리의 무게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대부분의 시골 아이들은 안다. 간혹 자전거 짐칸에 묶어 싣고 올 때에도 털털거리는 비포장도로 탓에 아까운 막걸리는 가만히 있는 법을 모른다. 아이들을 위해 의례 그랬어야 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면 아이는 무게감을 줄여 보려는 심산일 수도 있고 양을 줄여 자전거 뒤 안장 위에서 버려지는 막걸리를 조금이나마 보호하려는 갸륵한 뜻일 수도 있고 또 아니면 목이 말라서였을 수도 있지만 10번의 막걸리 심부름이 있었다면 10번 전부 주전자 주둥이에 대충 입을 대고 힘껏 빨아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면 달착지근한 막걸리 한 모금이 목젖을 타고 내려가 아침 식사가 얼마 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공복 상태로 변한 위장을 후끈 데워 놓았다.
자전거 여기저기에 막걸리 향을 묻혀가며...
아마도 아버지도 그런 아이의 몸짓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버지가 출출할 때쯤이면 아이도 역시 배가 고팠을 것을 알기에 김치 한 젓가락에 막걸리 한 사발로 새참을 대신하신 아버지가 이엉을 엮어 가신다. 첫눈이 내리기 전에 지붕을 올릴 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