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인가 딸아이의 수영강습을 다녀오는 차 안에서 딸아이와 방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어린 시절의 여름방학은 어쩌다 외가나 친가에 가는 게 전부였던 그렇게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들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외가에서의 여름 나기는 외가가 수박과 참외 농사를 짓는 덕분에 원두막에서 참외나 수박을 참 많이 먹은 기억이 있다. 비 오는 날 오후 원두막 계단을 올라 평상에 누워 눈을 감고 있노라면 수박 잎에 부딪히는 빗소리와 엎드려 턱을 받히고 산중턱을 넘어서는 구름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있는 일이었다.
수박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기에 시원한 우물물에 담가 두었다가 꺼내 먹기도 하고 수박이나 참외서리를 막기 위해 설치한 원두막에서 보초를 서다 가끔 서리를 하려다 실패한 이웃동네 아이들이 버리고 간 깨어진 수박을 먹는 일도 더러 생겨 하루의 식사량보다 많았다. 그렇게 많이 먹어도 별 탈이 없었는데 요즘은 무슨 생과일이든 몇 조각 이상을 먹으면 약간의 알레르기 증상이 나타난다.
외가 주변엔 반경 삼백 걸음 안쪽으로 두 분의 외숙이 더 사셨고 여름철이면 대체로 수박이나 깨 등 비슷한 작물을 재배하셨다.
외가의 집 구조는 ㅁ자 형태이다. 대문을 나서면 바로 왼쪽으로 외양간과 창고로 사용되는 흙벽돌의 간이 건물이 있고 대문 옆으로 몇 걸음 위쪽의 쪽문으로 나오면 화장실과 돼지우리로 사용되는 건물 한 채가 더 있었다.
외가 마당엔 오래된 대추나무 한 그루도 덩그러니 노쇄한 가지를 힘겹게 뻗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앞쪽으로 몇 이랑의 밭이 이어져 있고 집 뒷곁으로 돌아가 보면 참외와 수박밭이 원두막을 가운데 두고 넓게 펼쳐져있었다.
대문이 있는 마당 쪽 위의 밭을 지나면 마을회관이 반공 포스터나 표어가 붙어 있는 게시판과 함께 위치해 있었다. 몇 걸음만 더 옮겨 나가면 제방길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마을에 제방을 쌓은 것은 외가 마을인 궁평리의 남쪽에 위치한 도고산과 덕봉산에서 내려온 물이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외가 마을의 한가운데를 범람하여 관통하기 때문이다. 보통 때는 냇물이 하천부지의 1/4 정도의 폭만 적신다.
냇물의 폭이 2-3미터 정도이고 발목 정도의 깊이로 딱 물놀이하기 좋은 유속을 보이며, 굽이굽이 돌아 흐른다.
마을을 넓게 가로지르는 하천부지는 냇물이 흐르는 곳을 제외하고는 풀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궂은날을 제외하면 아침 녘부터 염소나 황소들이 외양간에서 나와 한가로이 풀을 뜯는 곳이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제방이 인접한 냇가 주위엔 갈대와 수초들이 특히 많이 자라나 있다.
물길이 하천 가운데를 지나는 장소에는 동네 아이들이 장난 삼아 쌓아 놓은 커다란 돌들로 물 수위가 높아져 물살이 빠르게 흘러내려갔다.
하천 위엔 하천 양쪽의 제방을 이어주는 다리가 놓여 있다. 하나는 기차가 다니는 철교다. 철교 외에 2개의 콘크리트 다리가 더 놓여 있는데 2-3년에 한 번 꼴로 장마철 큰 물이 범람하면서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다리가 쉽게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면 막내 외숙 집에 가기가 곤혹스럽다.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 몇 걸음을 더 해야 막내 외숙의 집인데, 외할머니는 다리가 무너진 그날 작은 외숙이 걱정되셨는지 철길을 건너 외숙 집으로 가셨나 보다. 외할머니가 없는 외가는 지금도 가끔 상상이 안 가지만 나의 어린 시절에도 엄마를 찾듯 외할머니를 찾아 나섰다.
지금의 고소공포증이 그때 생겨난 일인지 모르겠다. 철교는 좌우 양쪽이 붉은색을 칠한 철판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검은 기름칠을 한 목침을 놓고 레일 깔아 만든 형태였다. 밤새 내린 장마로 냇물은 황토색 물빛으로 거칠게 철교 밑을 지나고 있었다. 거친 물소리와 아찔한 높이다. 철교에 놓인 검은색 목침에 한 발을 올려놓고 내려 보면 정신이 아득하다. 거칠게 흐르는 물소리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철교 밑의 광경은 평소 잔잔하고 순한 그런 물빛이 아니었다. 철교의 시멘트 기둥을 강하게 밀어낼 기색이었다. 마치 커다란 괴수가 물속에서 몸부림치는 듯했다.
비가 그친 아침나절의 서늘한 기운으로 인해 목침 사이의 풍경은 굉음으로 인해 엄청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그 소리는 커다란 두려움으로 나의 심장을 두드려댔다. 그럼에도 어린 나이에 할머니를 찾아야 한다는 욕망이 더 강했는지 그 두려움을 안고 20미터 이상의 철교를 건너 작은 외숙 댁을 찾으니 외할머니의 꾸지람이 한가득이다.
외할머니는 자식인 작은 외숙의 망쳐진 농작물과 철길을 위험스럽게 건너온 외손주가 못내 답답하신 듯했다.
시골의 여름철은 해충과 더위와의 싸움이다. 옛날 어르신들은 이길 수 없는 것을 굳이 이기려 하지 않으신 것 같다. 해가 지면 할머니는 다리 위에 멍석을 깔아 놓고 동네 아주머니들과 모여 온갖 이야기 삼매경을 펼치셨다. 간혹 다리 밑으로 내려가 등목을 하며 더운 여름을 이겨내셨다.
그 여름밤 부채로 모기 쫓는 소리와 개구리와 풀벌레 울음소리 그리고 여름밤을 수놓고 있는 쏟아질 듯한 별빛이 당장 어제 일 같이 생생하다.
외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하게 불 때면 하천바닥에서 호미와 삼태기로 자갈을 채취하셨다. 머리엔 하얀 두건을 두르시고 동네 할머니들끼리 경쟁이라도 하듯 하천 바닥에서 호미로 자갈을 긁어 내 작업장 한쪽에 높이 쌓아 놓으셨다가 적당한 양이되면 자갈 채취업자에게 파셨다. 할머니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속옷도 사주시고 가끔은 철길 건너 상점에 가서 주전부리할 것들을 사오 시기도 했다.
장마가 지나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8월 방학이면 아이들은 냇가로 물놀이를 나간다. 작은 외숙에게는 내 또래의 외사촌을 비롯해 여자아이 5명과 2명의 사내아이가 있었다. 그 외사촌들만으로도 충분한 물놀이 인원이 되기도 해 숙식을 하는 외할머니 집에서 자주 작은 외숙 댁으로 놀러 갔다. 그날은 모두 물놀이를 끝낸 탓인지 나 혼자 물놀이를 하게 됐다.
작은 외숙 댁 앞 하천이 놀기에 그만이었던 것은 철교가 집 옆에 있었고 철교 밑으로 강한 햇볕을 막아주는 철둑과 철교의 그늘이 있어서다. 더불어 물을 가두기 위한 보도 설치되어 있어 보를 지나면 대부분의 냇물 수위는 발목 정도를 적시는데 비해 보가 설치된 곳의 수위는 허리춤까지 닿았다. 보의 가운데 부분은 수문 역할을 하도록 나무판자가 설치되어 있는데 보통 때는 나무판자를 볼 수가 없다.
아이들은 물장난도 칠 겸 수문 쪽에 돌을 쌓아 보 안의 물을 가득 채우고 놀았다.
그날 외사촌들은 작은 외숙 집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옮기 않은 통에 나는 혼자 보의 수문을 막으려고 커다란 돌을 옮겨 쌓기 시작했다.
그런데 좁혀진 출구로 인해 물살이 빨라지는 통에 쌓아놓은 돌이 무너지면서 내 몸이 물살과 함께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물 위에 떠가면서 본 하늘은 어느 때 보다 파랬다.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몸은 정착지가 어딘지 몰랐다.
아마 그것이 답답했을 듯하다.
그리고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창피했다.
떠내려감을 멈추게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스스로는 슬펐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는 닺겠지
누군가는 달려오겠지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몸은 여전히 물 위를 둥둥 떠내려가고 있다.
이젠 그냥 물의 성질을 따를 뿐이다.
힘이 빠져 물 위에 떠 있는 몸이 발버둥을 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을 듯싶다.
이렇게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사위가 침묵 속에 빠진 듯 조용하다.
아이들의 외침 하나 들리지 않는다.
귓속은 물 흐르는 소리와 웅 하는 소리만이
번갈아 가며 들릴 뿐이다.
물의 깊이가 발목 정도 임을 알았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접시 물에 코 박고 죽는다 것 그 죽는다는 것이 물의 양과는 관계없다는 것임을
그때는 알았을까!
사람에게 죽는 상황이 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처음에는 상황이 어처구니없음에 발버둥 치겠지
그런 다음은 점차 상황을 받아들여 가는 것일까?
그때 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몸의 일부가 수초에 닿은 듯 한 느낌이다.
이젠 또렷한 물소리와
작렬하는 태양
그 빛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살아 있음에
삶과 죽음의 경계가 종이 한 장 차이도 아님을...
어쩌다 방학이 혼돈으로 뒤엉킨 아우성으로 끝을 맺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