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먹거리만큼 중한 것이 어디 있을까.

시래기 기원이 긴 만큼 스토리도 많다.

by 이상훈

설이 지나고 겨우내 양식이 되어 주었던 김장김치가 떨어질 때면 하찮게 생각됐던 음식재료들이 주재료가 되어 등장하곤 한다. "세상 오래 살아볼 일"이라는 오래된 경구가 오묘에게 음식에도 적용되어 나타난다.
그 가운데 가장 흔했던 음식재료가 우거지와 시래기다. 내가 자랐던 시골에서 우거지는 김장용 배추를 씻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성한 큰 잎이나 소금에 절여졌어도 크기가 작아 김장용으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배추를 따로 모았다가 독 안에 양념을 버무린 김장배추를 가득 채운 다음 마무리 단계로 맨 위쪽을 덮는 용도로 이용됐다.

아마도 김치냉장고가 없던 시절 공기와 김장김치와의 접촉을 막아 김장김치의 숙성을 지연시켜 보존기간을 조금이라도 늘려 보고자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우거지는 아삭하고 적당히 유산균에 의해 발효돼 맛과 향이 절정에 달한 김장김치의 재고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걷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데 공기와 가장 많이 가장 오래 접촉하다 보니 하얀 곰팡이도 피고 군내라는 쿠리쿠리한 향은 물론 김치의 짓무른 촉감을 가지고 있어 시큼하고 새콤했던 것 같은 항아리 안에 있던 김장배추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어른들 특히 할머니들이 많이 드셨던 음식재료였는데 아마 부드럽고 소화가 잘돼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보통 투거리라고 불리는 질그릇 뚝배기에 담아 우거지 젓국을 끓여 먹었는데 삭힌 섬유질과 맛으로 독특한 향미를 느끼게 했다. 배춧잎에 국한하지 않고 무 동치미나 파김치도 마찬가지로 제일 윗부분에 덮여 있던 것들은 하나 같이 향과 맛이 독특했는데, 유산균에 의하여 섬유질의 상당 부분이 분해되어 소화장애를 겪는 이에게는 꼭 추천할 음식재료이다.

어쩌다 서울에서 게국지라도 먹게 되면 그 안에 우거지의 향미가 크게 느껴진다. 또한 게국지나 우거지나 성한 것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묘한 느낌이 든다.

시래기는 성한 잎을 따로 모아 말린 것이니 형상만을 놓고 보면 우거지와는 비교가 어려울 만큼 상품성이 있다. 말린 채소들의 특성상 많은 무기물질을 함유하고 있다는 장점도 있다. 무쳐서 먹을 경우에는 말린 나물류와 맛이 비슷한데, 끓는 물에 데쳤다가 차디찬 수돗물에 불리고 식혔다가 물기를 꼭 짜낸 후 들기름 등에 볶아서 먹거나 들깨가루와 된장 등속을 넣어 무쳐 먹으면 자극적이지 않아 끊임없이 먹게 된다. 발효된 우거지와는 확실히 다른 맛을 가지고 있다.
요즈음은 시래기만을 얻기 위한 무를 재배하기도 하는 등 시래기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내 어릴 적 아버지는 김장용 채소밭에서 얻어지는 시래기를 손질하여 추녀 밑에 달아놓고 돼지 여물로 삶아 주시거나 눈이 하얗게 내린 날 토기 먹이로 주셨던 기억이 선하다.

내가 좋아하는 시래기를 재료로 하는 음식은 붕어찜이다. 깔끔하게 손질된 붕어를 갖은양념으로 버무린 시래기로 가득 채우고 서너 시간 찜통에 끓였다 먹으면 시래기의 감칠맛은 최고 수준이지 않을까 싶다. 갑자기 소주에 붕어 뱃속에 들어 있는 시래기를 붕어 살과 함께 한 젓가락 하고 싶은 마음 불쑥 솟아오른다.

우거지와 시래기의 어원이 확실치는 않으나 일반적으로 우거지는 웃+걷(다)+-이 즉 ‘위에 있는 것을 걷어낸다’는 뜻인 ‘웃걷이’에서 나온 말이라 설이 있고 시래기는 고대 인도어인 'silage(사일로에 저장한 목초)‘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영문을 우리 식대로 읽으면 ‘시래 ㅈ/ㄱ’의 발음을 엿볼 수 있다.
어원적으로 보면 둘 다 말린 것이냐 젖어 발효된 것이냐와는 상관이 없는 듯하고 배춧잎이냐 무잎이냐로 구분되는 것도 아닌 듯하다.
제주 방언에는 밭을 갈 적에 일어나는 헝클어진 풀포기를 뜻하는 벌레기와 수확기에 다 성숙하지 못한 열매를 동모레기라고 한다 하여 어원적으로 시래기의 어원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또 다른 '~레기'가 들어가는 제주지역 방언을 찾아보니 머레기(일정한 장소), 모레기(벙어리) 등이 있다. 뜻이 먼 곳에 있으니 시래기와의 연관성을 논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우거지는 이제 찾기 어려운 음식재료이고 아무래도 카로틴과 엽록소, 비타민 B, C 그리고 식이섬유나 칼슘, 철분 등이 풍부한 시래기 음식이라도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맛보아야겠다.